- 1부 -
2018년 8월 26일 instagram(bincent.kim) 작성
“오랜만”은 포스팅을 여는 첫 단어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마지막으로 그림을 접한 지 한 달여 만에 국현을 찾았다. 작품을 찾는 텀이 길어질수록 방문하는 곳의 범위는 좁아진다. 국현을 포함하여 내가 나들이를 가기 전 1순위로 찾아보는 갤러리들은 한 달이면 새로운 전시를 열기 때문이다. 한 달 내에 또 다른 곳을 가지 않으면 그 다음 행선지 또한 학고재, 국제갤러리, 서울관 등으로 좁혀지는 것이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소격동을 찾았다. 학고재에 들렀지만 배경 지식이 없어서인지 칙칙한 그림은 이제 싫어져서인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전부터 기대하던 윤형근 작가의 그림으로 금방 발길을 돌렸다.
단색화를 좋아하지만 예전 갤러리 현대에서 있었던 정상화 작가의 개인전처럼 다소 단조롭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전시를 보며 송두리째 뒤집어졌다.
첫 전시실부터 상당히 흥미로웠던 점은 일반적으로 작가의 작품을 생각할 때 옅은 노란색 바탕에 검정 기둥 두 개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초기작은 상당히 다채로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환기 화백으로부터 사사하였다는 점, 후에 사위가 되었다는 점도 처음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여러 번 정치적인 이슈로 고초를 겪어오다 1973년, 45세의 나이에 숙명여고 입학 비리 사건으로 그 정점을 찍게 된다. 두 번째 전시부터 그 이후 변해버린 구성과 색채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윤형근 작가의 그림들은 특히나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간극이 큰 느낌이 들었다.
옆으로 이동하자 익숙한 그림들이 보였다. 공간으로 들어서며 느꼈던 가벼운 떨림은 전시장 바닥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로 한 점, 많아야 두 점 정도가 전시되어 있는 것만 보다가 이렇게 한 공간에 일련의 작품들이 모여 있으니,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 하나의 특징이 살아 있는, 서로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어 새로웠다.
캔버스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나를 돌아보고 그림을 돌아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건 참 오랜만이었다. 주로 단색화를 볼 때 이런 저런 것들을 많이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이 내가 이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이자 단색화의 매력인 것 같다.
마치 아무리 재미있는, 자극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들어대도 금방 지치고 질리고 자리를 뜨면 남는게 없을 때가 있지만 편안한 사람과 많은 대화 없이 조용하게 오랫동안 함께 있어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
이번 전시의 또다른 매력은 공간 기획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문’이라는 것을 전시 공간에 그대로 구현했다는 것이다. 한 공간의 벽 면이 문처럼 뚫려있어 다른 곳의 작품을 그것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은 공간 자체로 작품의 주제를 드러나도록 하는 훌륭한 설정인 것 같다.
90년 대에 들어서면서 익숙했던 형태는 한 단계 변하게 되어 색과 형태는 더욱 간결해지고 이는 미니멀리즘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드러낸다. 도널드 저드가 당시 한국을 방문하여 이 작품을 보고 달리 매료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을 가득 메운 검정색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처음엔 그 색감에 압도되는 것 같지만 시간이 갈수록 따뜻함을 느끼게 되고 “진실로 서러움은 진실로 아름다움 하고 통한다.”는 작가의 생각에도 공감을 하게 된다.
종종 미술품의 가치에 대해 폄하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특히 이우환, 이강소 작가의 그림과 같은 작품들을 두고 모진 비판을 하곤 한다. 물론 그들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고 분명 과대평가 되거나 불순한 의도가 숨은 작품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속 시원하게 반박을 하고 싶지만 부족한 식견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 때문에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다음 번에 그런 대화가 오간다면 이 전시를 추천해주고 싶다.
- 2부 -
2018년 8월 26일 instagram(bincent.kim) 작성
지난 번 미처 가지 못한 8전시실. 전시의 3부. 다시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을까. 나에게는 3부가 이번 전시의 백미이며 작가의 작품세계와 예술을 대하는 방식, 철학,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고 이 모든 것은 ‘진정성’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성. 흔히 이상의 기준을 진선미로 삼지만 작가는 진이면 선이고 선이면 미이기때문에 굳이 세 가지나 있을 필요가 없으며 진 하나로 충분하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작업 과정이나 그 결과에 오롯이 드러난다. 또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작품 간 괴리가 없어야 한다고 한다.
막 살면서 좋은 작품을 할 수 없다는 것인데 나는 이 생각에는 조금 공감하기 어렵다. 막 사는 것의 정의를 내리기도 어려우며 개같이 살면서 걸작을 낸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을 갖고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로서 그의 자세는 정말 존경스럽고 아름다웠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타협을 하고 은근슬쩍 넘어가고 핑계를 대며 살아왔던가. 지금도 예술가가 아니라서 좀 타협하며 살아도 되지 않냐고 변명을 하고 있지 않은가.
기억에 남는 것은 작가의 일기와 작가노트. 작업을 하고 생을 살아오며 느꼈던 감정들을 끄적여 놓은 노트를 보며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고민들이 의외로 현실적이고 지금 시대의 우리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도 참 재미있었다. 노트 자체는 뒤적여볼 수 없고 스크린으로 스캔본이 지나가는데 속도가 빨라 아쉬웠다. 관람객이 직접 넘길 수 있도록 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사진첩의 사진들을 하나씩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것도 좋았다. 한 사람의 일생을 아이 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나이가 들어가며 겉모습이 변해가는 것을, 일생의 중요했던 사건들을 한 순간, 한 자리에서 지켜보며 작가의 가치관과는 달리 정말 효율적이라는 생각, 나중에 내 삶도 이렇게 5분만에 요약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5분 거리는 될까라는 생각 등이 겹치며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미술관을 나와 밀려있는 일을 보러 회사로 향했다. 회사가 가까워 종종 이 짓거릴 하곤 하는데 내가 성불한 것은 아니더라도 정직하고 순수하며 아릅답고 깨끗한 공간에서 속되고 위선적이고 깃털보다 가볍고 얕은 곳으로의 이동은 늘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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