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instrgram(bincent.kim)에 작성...하려다 저장만 해놓고 못한 걸 이제 마무리
포스팅을 시작한지 어느덧 6개월이나 지났는데 국제갤러리에 대한 글은 처음 쓴다. 폴 매카시展 이후 특별히 끌리거나 다녀온 뒤 여운이 많이 남는 전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로니 혼 전시가 끝나갈 무렵부터 많은 기대를 안고 있었다. 최근의 윤형근展처럼 단색화의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유영국 작가의 개인전을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2년 전 덕수궁관에서의 개인전을 놓친 것을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리뉴얼 때문인지, 오랜만에 방문해서인지 첫번째 전시실부터 조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의 탁 트인 듯한 공간에 벽이 생겼고 작품을 두 어 점 더 걸 수 있는 점은 좋았다. 다소 낯선 느낌의 초기작으로 시작되는 전시. 사실 초기작이라기 보다는 작업의 분기점이라고 볼 수 있는 1964년 이전 작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내게 좀 더 익숙한 후기작들에 비해 조금은 정제되지 않은 듯한 거친 이미지와 어두운 색감은 약간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소 작가의 그림을 보면 참 간결하고 맑은 느낌이 들고 그래서 마음이 차분해지는데 이 곳의 그림들은 난해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포스팅을 하면서 느낀 건데 자꾸 보다보니 이 그림들도 정제되지 않은 자유분방하고 거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화면을 칼로 째놓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무언가에 억압된 상태로 몸부림 치는 듯한, 그러면서도 그런 것들이 진한 원색들의 섞임으로 해소되는 것 같은 시원한 기분도 든다.
전시 설명에는 "국가의 상실, 참담한 전쟁, 남북분단, 이데올로기의 갈등 등 20세기 한국 근대사를 구성한 역사적 현실과 조우하며 인간의 존엄성, 자유와 같은 절대성을 일깨운다."라고 하는데 아직 그렇게까지 무거운 주제로 받아들여지진 않지만 분명 보다보면 중후함 속에 녹아있는 힘찬 기운은 느낄 수 있다.
2층에는 아카이브와 사진, 영상물들 위주로 전시되어 있는데 나는 이 아카이브 섹션이 참 좋다. 우리는 좋아하는 화가는 있어도 정작 그 화가가 어떤 걸 좋아했는지, 누구랑 어울렸는지, 심지어 얼굴도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렇게 작가의 미술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아기자기한 정보들을 보면 좀 더 예술가로서의 작가를 넘어 사람으로서의 작가를 알게 되는 것 같다.
3전시실은 유영국 작가의 특색을 정말 잘 나타내는 아름다운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항상 느끼지만 들어갈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전시 공간의 아우라도 그 아름다움에 한 몫 더한다. 높은 층고에 깨끗하고 넓은 흰 벽면, 입구 반대편에서 들어오는 자연광 등 미술품이 놓여 있기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한다. 가운데 의자가 있어 조금 더 오랫동안 편하게 볼 수 있다면 더 좋겠다.
도형의 기하학적 배치, 평형, 대칭을 통해 조형미가 드러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완벽한 대칭을 벗어난 변형들이 곳곳에 녹아있어 재미있다.
전시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은 거의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심지어 또박또박 쓰는 서명조차 가운데에 되어 있다. 처음에는 작가가 유작이 될 것을 어느 정도 직감하고 이런 구도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지막을 직감했다기보다는 또다른 연작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이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아쉬움이 남았다.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가까운 윤형근전과 비슷한 시기의 비슷한 화풍이지만 담고 있는 주제와 색의 사용에 있어 각자의 특색이 뚜렷하여 대조가 되는 부분도 재미있었다. 또 얼마나 좋은 것을 보여주려고 이런 전시를 한 달 남짓밖에 하지 않는 것일까...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우리는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몬드리안의 이야기는 참 식상하고 진부한 내용이지만 그만큼 듣는 순간 새삼스레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노력을 어느 정도 함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반 이상은, 아니면 그보다 더,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에 더 매달리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게 될 것 같은 안정감 속에 두려움이 생긴다. '진정성'을 강조한 윤형근 작가의 그림이 떠오른다고 했던 것도 이 대목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끝으로 덧붙이면, 국제갤러리 뒷뜰과 3전시실로 이어지는 골목이 좋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아름다운 그림들을 보고난 뒤의 여운을 조금 더 오래 가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