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단편] 밀려오고 빠지는

원인 없는 것들에 대하여


그것은 11월 중순의 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나는 사무실 창가에 서서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한 어중간한 날씨였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K였다.

내가 어떤 일을 맡긴 사람이다.

그 일의 결과가 나왔나보다 싶어 전화를 받았는데, 그가 하는 말이 이상했다.


"저기, 사실은..."

그가 말을 흐렸다.


"제가 날짜를 착각했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일주일 전에 이미 결과가 나왔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걸..."

그의 설명은 뒤죽박죽이었다.


결과가 나왔다는 것, 좋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

나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미뤄졌다는 것.

하나하나가 맞지 않는 퍼즐 조각 같았다.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창밖의 흐린 하늘이 조금 전과 똑같이 보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무언가가 변한 것이다.

분명히. 


나는 사십대 초반이다. 작은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주로 상가 인테리어와 소규모 주택 리모델링을 맡는다.

직원이 세 명 있고,

간간이 외주 설계사에게 일을 나눠주기도 한다.

크게 번 적도 없지만 망한 적도 없는, 그런 사무소다.


2년 전쯤, 어떤 분쟁에 휘말렸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요점만 말하자면 나는 뭔가를 잃었고,

그것을 되찾으려고 K에게 일을 맡겼다.

그가 그 분야의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들었다.


하지만 일은 처음부터 잘 풀리지 않았다.

서류가 누락되고, 연락이 늦어지고, 약속이 미뤄졌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이런 일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고.

그리고 오늘, K가 날짜를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되찾으려던 것을 되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몇 년치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지는 숫자였다. 


저녁 무렵, 나는 광안리 해변을 걸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바다가 회색빛이었다.

파도가 낮게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개를 산책시키는 여자가 지나갔다.

평범한 저녁 풍경이었다.


어느 시점에 나는 깨달았다.

아, 이건 애초에 안 될 일이었구나.


K에 대한 원망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은 분노가 치밀었다.

날짜를 착각하다니. 일주일이나. 그것도 이런 일에서.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분노도 어딘가로 빠져나갔다.

그것이 본질은 아닌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다.

서류를 잃어버린 것도,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 것도,

담당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본 것도.

하나씩 따로 놓고 보면 각각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것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건 확률적으로 드문 일이다.

그런데 그 드문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나는 예전에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모든 것이 동시에 어긋나는 순간.

당사자가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여러 가지 작은 실수들이 겹치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겹쳐서 최악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나는 해변가 벤치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었다. 민트 향이 입안에 퍼졌다.

광안대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란색이었다가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도 바다지만, 다른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나트랑이나 푸꾸옥 같은 곳.

햇살이 뜨겁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가서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


하지만 당장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K에게 맡겨야 한다.

그가 제대로 하든 못 하든.

돈을 지불하고, 더 이상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마무리하는 것.

그게 남은 일이었다.


바다 위로 배 한 척이 지나갔다.

불빛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어떤 일들은 막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최대한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시기에도 끝이 있다는 점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지나간다.

그때까지 버티면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하이볼 캔과 소시지를 샀다.

계산대의 젊은 직원이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나도 "수고하세요" 하고 대답했다.

그게 전부였다.


집에 돌아와 소시지를 뜯고 하이볼을 마셨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했고, 어디선가 무슨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나는 이불 속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용했다.

가끔 바깥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곧 멀어졌다.


그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냥 이렇게 된 거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내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상대방이 대단해서도 아니다.

K가 무능해서도 아니다.

물론 무능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다.

그냥 운이 나빴다.


잃어버린 돈은 크다. 몇 년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받아들이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처럼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커피를 내렸다.

창밖으로 햇살이 비쳤다.

어제의 흐린 날씨와는 달랐다.


K한테 연락해야 한다.

마무리를 짓도록 해야 한다.

잘 되면 좋겠지만 안 되면 그것도 어쩔 수 없다.


커피잔을 들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바다가 보였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K의 번호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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