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단편] 시효

어느 초겨울, 이십 년도 더 된 숫자들

오후 네시 반쯤 되었을 때

창밖을 보니 해가 일찍 기울고 있었다.

어제부터 갑자기 추워졌다.

일주일 전만 해도 점퍼 하나로 충분했는데,

이제는 코트가 필요했다.

계절이 며칠 사이에 건너뛰어버린 것 같았다.


책상 옆 서랍에서 한 장짜리 서류를 꺼내 다시 읽었다.

이미 서너 번은 읽은 내용이었다.

글자들이 종이 위에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사실관계는 명확했고, 결론도 명확했다.


다섯시에 박선생이 온다.


나는 서류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건너편 건물 옥상에 여름용 파라솔이 접힌 채 세워져 있었다.

누군가 치우지 않은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쓸 일이 없을 텐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탕비실에 가서 커피를 내렸다.

특별히 마시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손에 따뜻한 것을 들고 있으면

시간이 좀 더 빨리 지나갈 것 같았다.

어젯밤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새벽 두시쯤 잠이 깨어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문 틈으로 찬 공기가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서재로 가서 이것저것을 뒤적거렸다.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십 년 전이었다.

그때 그는 마흔셋이었고, 지금은 쉰셋이다.

처음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

그는 낡은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빚 독촉장들이 들어 있었다.

전부 다 합치면 팔천만 원이 넘었다.


원래 빚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형에게 이름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형은 사업에 실패했고, 어딘가로 떠났다.

남은 것은 숫자들뿐이었다.

박 선생은 그 숫자들을 모두 떠안았다.


나는 그동안 그의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해왔다.

회생 절차도 진행했고,

중간중간 불쑥불쑥 나타나는 오래된 빚들도 정리해왔다.

그때마다 박 선생은 조용히 서류에 서명을 하고 돌아갔다.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몇 년 전 박 선생은 모든 빚을 청산했다.

면책 결정을 받은 날,

그는 사무실에 와서 아무 말 없이 한참 앉아 있었다.

나는 커피를 권했고, 그는 그것을 천천히 마셨다.

다 마시고 나서 그가 말했다.


"이제 끝난 거죠?"


"네, 끝났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사무실 문을 나서며 그가 말했다.


"오랫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는 그때 정말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석 달 전 법원에서 서류가 날아왔다.

이십 년도 더 된 채무였다.

원금은 이천오백만 원 정도였지만,

수십년 동안의 이자가 붙어 일억 삼천만 원이 넘었다.

채권자는 그동안 꼬박꼬박 시효를 중단시켜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박 선생 본인도 몰랐다.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처음에는 방법이 있어 보였다.

중간에 시효가 끊긴 구간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추완항소를 했고, 그 부분을 다퉜다.

계산대로라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지난 주에 상대측이 새로운 증거를 제출했다.

알고 보니 중간에 또 하나의 판결이 있었던 것이다.

시효는 끊기지 않았다.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채권자는

세 번의 판결을 받아 시효를 연장해왔다.

처음에는 두 개만 제출했다가,

우리가 빈틈을 지적하자 세 번째 판결을 꺼내든 것이다.


집요했다. 그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서류를 받아들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섯시 오 분 전에 박 선생이 도착했다.

그는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얇아 보였다.

아마 갑자기 추워져서

두꺼운 옷을 미처 꺼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머리카락이 많이 세어 있었다. 십 년 전보다 훨씬 더.


"갑자기 많이 춥네요."


"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는 의자에 앉으며 두 손을 비볐다.

손끝이 붉게 얼어 있었다.

나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이 없었다.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화로 미리 이야기해두었으니까.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가능한 한 간결하게.

그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들렸다.


설명을 마쳤을 때 박 선생은 테이블 위의 서류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손이 서류 위에 놓여 있었다.

손등에 검버섯이 몇 개 떠 있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 가지 방법을 검토해봤습니다."


나는 준비해둔 대안들을 설명했다.

분할 상환 협의. 재산 정리. 다른 가능성들.

어느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저 덜 나쁜 방법들이었다.


박 선생은 끝까지 듣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빨리 지는 계절이 된 것이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네."


그는 일어섰다. 나도 일어섰다.

그는 코트를 집어들고 천천히 입었다.

단추를 잠그는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추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그가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변호사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문이 닫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소리가 멈추고, 다시 조용해졌다.


저녁 일곱시가 넘어 사무실을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바람이 불었다.

코트 깃을 세우고 걸었다.

가로수들이 잎을 거의 다 떨구고 있었다.

남은 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며칠 안에 전부 떨어질 것이다.


건너편 건물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파라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아무도 치우러 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가방을 들고 지하철역 쪽으로 걸었다.

발밑에서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모두 코트 깃을 세우고 있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박 선생은 지금쯤 어디를 걷고 있을까.

그 얇은 코트로 이 추위를 견디고 있을까.

나는 그것을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것을 생각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는 조금 따뜻했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곧 열차가 들어왔다. 나는 열차에 올라 빈자리에 앉았다.


열차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터널 벽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일 다시 사무실에 가면

또 다른 서류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름들. 또 다른 숫자들.

그것들을 하나씩 처리해나가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겨울은 이제 시작이었다.


열차가 다음 역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잠깐 밀려들어왔다.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문이 닫혔다.

다시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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