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습작] 새벽의 문턱

새벽 4시의 어둠

1.


그 일이 있은 것은 십이월의 어느 토요일 새벽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네 시에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캄캄했고,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건물 사이를 지나가는 겨울바람 특유의 소리였다.

낮고 긴, 무언가를 애도하는 듯한 소리.


옆에서 그녀가 자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십오 년간 몸에 익힌 리듬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새벽 네 시면 눈이 떠진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몸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확실했다.

칠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불편했다.

사랑하는 것과 불편한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했다.


나는 원래 새벽에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세상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그 고요한 시간.

책을 읽거나,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나만의 시간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온전히 나에게만 속한 시간.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이 얕은 사람이었다.

작은 소리에도, 희미한 빛에도 눈을 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눈을 뜬 채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내 황금같은 시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흘러가고 있었다.


2.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때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조용히 일어나 롱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서기로 했다.


불을 켜지 않고 옷을 입었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십이월의 새벽 공기는 날카로웠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핸드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타고 사무실 주소를 말했다.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토요일 새벽, 이 시간에 사무실로 가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사무실에 도착해 커피를 내렸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뜬다.


밀린 서류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손이 움직이고 눈이 화면을 훑었지만

머리는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왜 나는 내 집에서 나와 이곳에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집에서 자고 있는데.


3.

오전 아홉 시가 넘어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 화면에 그녀의 이름이 떴다.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심장이 약간 빠르게 뛰었다.


어디 있느냐고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방금 일어난 것 같았다. 아니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무실에 있다고 대답했다.

왜 거기 있느냐고 물었다.

목소리에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사무실에 있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나왔다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새벽에 눈을 떴는데,

내가 거기 있으면 또 당신 잠을 깨울 것 같아서 나왔다고.

갈 곳이 없어서 사무실에 왔다고.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십 초쯤 지났을까. 아니면 삼십 초였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자기도 여섯시 반쯤에 일어났다고 그녀가 말했다.

내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집 청소를 했다고. 내 방 청소를.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돌렸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어떤 묘한 감정을 느꼈다.

미안함과 답답함이 뒤섞인,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녀는 내가 없는 사이에 내 집을 청소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배려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청소를 다 했으니 자기 집으로 가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조심히 가라고 말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전화가 끊어졌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내가 미안해할 것이 무엇인가.

새벽에 눈을 뜬 것이 잘못인가.

내 집에서 나와야 했던 것이 잘못인가.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배려한 것이 잘못인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옆에 아무도 없다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불안했을 수도 있다. 어디 갔을까 걱정했을 수도 있다.

그 마음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무언가가 잘못될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그런 행위는 관계에 좋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4.


그녀와 나는 칠 년째 만나고 있다.


결혼한 사이는 아니다.

나는 십 년 전에 이혼했고, 그녀는 결혼한 적이 없다.

각자 자신의 집이 있고, 각자의 생활이 있다.

가끔 만나고, 가끔 함께 시간을 보낸다.

주말에 만나서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냥 함께 있거나. 때로는 여행을 가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좋았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친밀함.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함께하는 느낌.

완벽한 균형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였다.

지금은 마흔일곱이 되었다.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이혼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여자.

둘 다 나름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과거를 묻지 않았다.

지금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처음의 열정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익숙함이 들어섰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로의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경 쓰이지 않았던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열한 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일어난다.

이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생활 패턴이었다.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했고, 원래 체질이 그런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 패턴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바꾸려고 노력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반면 그녀는 소위 '야간형 인간'이다.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오전 열 시는 되어야 일어난다.

그녀에게 아침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할 일이 있으면

그녀는 전날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반면 밤에는 활기가 넘쳤다. 자정이 넘어도 멀쩡했다.

한 시, 두 시까지도 깨어 있을 수 있었다.


우리의 생활 패턴은 정반대였다.

내가 잠들 시간에 그녀는 막 활동을 시작하고,

내가 일어날 시간에 그녀는 가장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수면 환경에 민감했다.

몇 년 전 큰 병을 앓은 후로 더 그랬다.

집의 온도는 낮아야 했고, 빛은 완전히 차단되어야 했으며,

소리는 일절 없어야 했다.

그녀의 기준에 맞추려면 많은 것을 감수해야 했다.


한번은 새벽에 화장실을 갔다가 그녀를 깨운 적이 있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눈을 떴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충분했다.

피곤함과 짜증이 섞인 표정.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은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 한번은 내가 잠결에 코를 골았다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코를 고는 것은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의식이 있을 때도 아닌데.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짜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코골이 수술을 권했다.

이유는 충분히 알겠지만 왠지 선뜻 내키지 않았다.


5.


일주일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금요일 밤에 그녀가 내 집에 왔고,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평소처럼 열한 시 무렵에 잠이 들었다.


그녀는 아직 자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의 푸른 빛이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토요일 새벽 네 시에 눈을 떴다. 평소처럼.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월요일까지 보내야 하는 서류가 있었다.

주말에 하려고 미뤄둔 일이었다.

어차피 새벽에 일어나니까 그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려 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하지만 그 순간, 그녀가 눈을 떴다.

내가 움직이는 기척에 깬 것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소용없었다.


왜 벌써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잠에서 깬 직후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할 일이 있다고 대답했다. 서류 작업이 있다고.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미리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거라고. 왜 말 안 했느냐고.


그 순간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분노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허탈함이라고 해야 할까.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여기는 내 집이었다. 내가 돈을 내고 사는 집이었다.

내 이름으로 된 집이었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일을 하든,

운동을 하든, 책을 읽든, 그것은 내 자유였다.

그런데 왜 나는 눈치를 봐야 하는가.

내 집에서. 왜 미리 허락을 구해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면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새벽에, 그것도 토요일 새벽에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등 뒤에서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따갑게.


그녀는 잠시 후 옷을 챙겨 입고 자기 집으로 갔다.

새벽 다섯 시였다. 밖은 아직 캄캄했다.

바래다 줄까라고 물었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보내고 일을 했다. 아니, 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서류를 보고 있었지만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굳은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며칠이 지나고 우리는 화해했다.

서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도 미안하다고 했고, 그녀도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이고, 그녀는 잠이 얕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바뀌지 않았다.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6.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창가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토요일 오후의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가족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했다.

커피를 들고 걷는 사람,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쇼핑백을 든 사람.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물론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

저 연인들도 집에 가면 싸울지 모른다.

저 가족들도 각자의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했다.

칠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은 없다.

이 나이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었다.

사랑과 불편함은 공존할 수 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두 가지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사랑한다면 감수해야 한다고.

사랑한다면 참아야 한다고.

상대방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쪽이 계속 참고, 계속 맞추고, 계속 양보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인내심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사랑해도 한계가 있다.


불편함은 쌓인다. 작은 불편함들이 하나씩 쌓이면

어느 순간 견딜 수 없는 무게가 된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이었다.

신경 쓰이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

하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폭발한다.

그때쯤이면 사랑이고 뭐고 상관없어진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다.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편해서 헤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데도 헤어지는 커플이 있다.

그들은 사랑이 식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다.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지속되면, 결국 사랑도 멀어진다.


처음에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불편함 때문에 사랑도 줄어든다.

선후관계가 다른 것이다.

사랑이 식어서 불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이 쌓여서 사랑이 식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순서를 착각한다.

헤어진 커플을 보면서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불편함이 먼저고, 사랑이 식는 것은 그 다음이다.


7.

저녁이 되어 나는 근처 식당에 혼자 밥을 먹으러 갔다.

작은 일식집이었다. 예전에 그녀와 함께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때는 둘이서 왔었다. 지금은 혼자였다.


카운터에 앉아 정식을 시켰다.

생선구이와 밥, 된장국, 몇 가지 반찬이 나왔다.

혼자 먹기에 적당한 양이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것은 칠 년 전의 겨울, 아는 사람의 모임에서였다.

친구의 친구가 주선한 자리였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녀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우연이었다. 아니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그녀는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묶어 올렸고, 화장은 연했다.

첫인상은 조용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주도했고,

나와 그녀는 주로 듣는 역할이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모임이 끝나고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우연히. 같은 지하철역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별 것 아닌 이야기였을 것이다.


날씨나 음식에 대한 이야기. 모임에 대한 이야기.

중요한 것은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기분이 좋았다.


이혼하고 몇 년이 지난 후였다.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에 실패한 후, 연애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혼자가 편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걸으면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조금 열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에게서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그냥 편했다. 함께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칠 년이 지났다.


8.


저녁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였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그녀의 이름이 떴다.


뭐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부드러웠다. 화가 풀린 것 같았다.

집에 있다고 대답했다. 텔레비전 보고 있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고.

자기도 너무 예민했던 것 같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계속 말했다.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쓰겠다고.

내가 새벽에 일어나도 괜찮다고.

자기가 적응하겠다고. 노력해 보겠다고.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녀가 먼저 연락하고 먼저 사과한 것에 대해 고마웠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가 불편했다.

그녀의 말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녀가 참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는 것은 해결이 아니다.

참는 것은 쌓이는 것이다.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언젠가는 폭발한다.

그때는 더 크게 폭발한다.


그녀가 나를 위해 참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지 않고

누워 있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것도 공평하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은 내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첫 번째 결혼이 그랬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저녁 시간의 평범한 풍경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 둘 다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가.

누구 한 명이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않고,

둘 다 자기 삶을 유지하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그런 방법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솔직히 답을 모르겠다. 아직은.

하지만 답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딘가에 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둘이서 함께.

혼자서는 찾을 수 없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시도하고,

함께 실패하고, 함께 다시 시도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9.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쉰 살에 가까운 중년의 남자.

머리카락에는 흰 것이 섞여 있었고,

눈가에는 주름이 졌다.


한 번 결혼에 실패한 남자.

그리고 지금 또 다른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자.

거울 속의 그 남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을까.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녀를 원하고 있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

그녀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다만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사랑 외에 다른 것들도 필요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러면서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은 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노력이다.

그리고 그 노력을 기꺼이 할 생각이 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 무너진다.

내가 계속 참으면 언젠가 폭발할 것이고,

그녀가 계속 참으면 그녀가 폭발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좋지 않다.


진짜 답은 둘 다 조금씩 양보하면서도,

둘 다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인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찾아볼 생각이다. 포기하지 않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어둠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일요일이다.

모레는 월요일.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말이 가기 전에 그녀에게 연락을 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내 불편함에 대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감추지 않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웃음.

그것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칠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

달라진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일 새벽 네 시에 나는 다시 눈을 뜰 것이다.

그것은 확실했다.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것들이다.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처럼.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처럼.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잠이 들었다.

희망을 품고. 내일을 향해.

작가의 이전글조언의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