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아직 해가 완전히 올라오기 전.
새벽부터 집 안에는 커피 내리는 소리부터 번진다.
물이 끓고, 원두가 갈리고, 잠깐 기계가 말을 안 듣는다.
이런 사소한 어긋남들은 여행을 앞둔 아침마다 반복된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런 어수선함이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것을.
8시가 조금 안된 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단체 톡방이었다.
새해 첫 근무일.
대학동기들의 메시지가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시무식 몇 시야?'
'10시래. 늦지 마.'
'새해 복 많이 받아들.'
'올해도 잘 부탁해.'
나는 그 메시지들을 읽지 않고 화면을 껐다.
오늘 11시 비행기다. 목적지는 나트랑.
나는 이 사실을 굳이 소리 내어 말한다.
"오늘 11시 비행기로 나트랑을 간다."
말로 확인해야 비로소 현실이 되는 일들이 있다.
캐리어를 연다.
이번에도 큰 캐리어다.
혼자 떠나는 여행치고는 늘 크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이 캐리어는 돌아올 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여행지에서 물건을 거의 사지 않는다.
오히려 입고 간 옷과 읽고 간 책,
그리고 이미 역할을 다한 물건들을 가지고 가서
현지에서 버리고 온다.
물건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짐을 줄이는 행위가 아니다.
낡은 티셔츠를 호텔 쓰레기통에 넣을 때,
다 읽은 책을 로비 책장에 꽂아둘 때,
나는 그 물건과 함께 무언가를 놓고 온다.
그동안 쌓였던 것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
털어내지 못한 찌꺼기 같은 것들.
그렇게 나는 무엇인가를 버리는 연습을 한다
앞으로의 삶을 위해서
그래서 큰 캐리어가 필요하다.
버리고 올 여유를 담기 위해서.
그것이 내가 여행 가방을 싸는 방식이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여행의 의미다.
내 앞에는 내가 만들어 둔 리스트가 있다.
종이에 적힌 것도 아니고, 거창한 계획표도 아니다.
몇 번의 여행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굳어진 순서들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괜히 마음이 바빠질 때 한 번씩 눈으로 확인하는 용도에 가깝다.
필수서류, 옷가지, 약, 운동용품, 수영용품.
이 항목들은 이제 외울 수 있을 만큼 익숙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씩 확인하며 짐을 싼다.
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이제 떠나도 되겠다'는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여권을 찾는 순간, 잠깐 심장이 내려앉는다.
"설마 사무실에서 안가져왔나?"
여행 전 아침마다 반복되는 아주 짧은 공포.
다행히 여권은 집 안 어딘가,
내가 분명히 빼두었을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안도의 숨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온다.
지갑을 정리한다.
여권을 넣고, 달러를 고르고, 신용카드를 추린다.
동전지갑은 아예 서랍에서 빼지 않았다 .
베트남에는 동전이 없다.
몇 번의 여행을 거치며 몸이 먼저 알게 된 것들. 별건 아니지만.
옷을 하나씩 꺼내 바닥에 놓는다.
3박 5일이니까
반팔 티셔츠 셋, 반바지 셋, 양말 셋.
이 숫자는 계산이라기보다 리듬에 가깝다.
그리고 이 옷들 중 일부는,
아마 돌아올 때 이 캐리어 안에 없을 것이다.
충분히 입은 옷. 더는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그 자리에서 정리한다.
호텔 방 쓰레기통에, 혹은 거리의 수거함에.
그렇게 놓고 오면 그 옷에 붙어 있던 시간도 거기에 남겨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러닝화와 운동복을 챙긴다.
여행 중에도 달릴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이제는 자연스럽다.
운동은 더 이상 특별한 계획이 아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못 하면 안 한다.
다만 챙긴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지금의 리듬에 붙잡아 둔다.
수영복과 수경을 꺼내며 잠깐 멈춘다.
얼마나 수영을 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챙긴다.
실행보다 준비가 먼저라는 걸, 이제는 안다.
약 봉투를 정리한다.
혈압약, 위염약, 뇌영양제, 소염진통제, 기타 등등.
원래는 혈압약만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한달 전 건강검진 후 약이 늘었다.
예전에는 여행 가방에 약이 들어가는 게 싫었다. 지금은 다르다.
몸을 돌보는 일은, 스스로에게 지는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다.
이건 불안의 표시가 아니라 자기 관리의 최소 단위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까 그 동기들 모임 톡방의 메시지가 계속 쌓이고 있었다.
'올해 목표 뭐야?'
'일단 살아남기ㅋㅋ'
'새 사무실 적응해야지. 스트레스 만땅.'
'창원 출장 있는 사람?'
'새벽길 운전 힘들겠다.'
모두들 새해 첫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고, 회의실로 향할 것이다.
시무식이 끝나면 커피를 마시며 연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위화감도, 열등감도, 우월감도 없다.
그냥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뿐이다.
그들에게는 시무식이, 나에게는 이 여행이.
둘 다 새해의 시작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휴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증명하러 가는 여행도 아니다.
다만 하나의 국면이 끝났다는 감각,
그리고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의 정리 시간에 가깝다.
2025년이라는 긴 장이 닫혔고,
아직 페이지를 완전히 넘기기 전의 구간.
나는 그 중간 지점에 서 있다.
캐리어를 닫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다.
빠진 건 없는지,
굳이 안 가져가도 될 걸 또 넣은 건 아닌지.
그리고 몇 가지는 다시 꺼낸다.
태블릿은 두고 간다. 필요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대신 책을 두 권 넣는다.
이 책도, 돌아올 때까지 함께할지는 모른다.
만약 여행기간 동안 다 읽는다면 나트랑 어딘가에 남겨두고 올 것이다.
괜찮다. 그래야만 더 진지하게 읽게되더라. 경험상.
한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캐리어는 닫혔고, 집 안은 잠시 어질러져 있다.
하지만 이 어질러짐은 곧 사라질 것이다.
집은 다시 정리되고, 나는 공항으로 향할 것이다.
나트랑은 햇빛이 강하고, 바람이 있고,
아무도 나를 잘 모르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잘 먹고, 조금 움직이고, 조금 쉬고,
생각이 나면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필요 없어진 것들은 조용히 놓고 올 것이다.
물건과 함께, 그 물건에 붙어 있던 시간과 감정도.
문을 나서기 직전, 캐리어 손잡이를 한 번 더 잡아본다.
무게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제 정말 떠난다는 걸,
손으로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왔다.
1월의 새벽 공기. 부산의 겨울은 생각보다 매섭다.
숨을 들이마시면 폐가 시려왔다.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었다.
11시 비행기. 원래대로라면 9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집에서 김해공항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 남짓.
조금 늦기야 하겠지만 큰 일이 있을 정도는 아니니까.
하지만 비엔젯 항공은 조금 달랐다.
보딩 시간이 유난히 빠르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전철을 탔다.
아침 출근 시간대라 사람이 제법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창밖으로 도시가 스쳐 지나갔다.
저 사람들 중 일부는 시무식에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창원으로, 진해로, 어딘가의 사무실로.
나는 다른 방향으로 간다.
전철이 한 정거장씩 멈출 때마다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직 여유가 있다고.
공항에 도착한 것은 9시 40분이었다.
2시간 전 도착이 원칙이라면, 이미 40분이 늦은 셈이었다.
하지만 '뭐 별 문제가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엔젯 항공의 보딩 시간은 놀랍게도 10시 15분이었다.
출발 45분 전. 다른 항공사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10분 안에 탑승을 완료하라는 안내가 떴다.
시간이 없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출국장으로 뛰었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면세점 구역을 지나쳤다.
아무것도 볼 여유가 없었다.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지막 탑승 안내가 나오고 있었다.
허겁지겁 비행기에 올랐다.
창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숨이 찼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머리가 복잡할 줄 알았다.
나트랑에 간다는 것,
작년의 기억, 징크스, 그런 것들이 떠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몸이 좌석에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바퀴가 지면을 떠났다.
창밖으로 도시가 작아져 갔다.
건물들이 점이 되고, 도로가 선이 되고,
모든 것이 납작한 지도처럼 변해갔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동기들은 시무식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 있다. 구름 위로 올라가고 있다.
비행시간은 5시간.
그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의
'댄스댄스댄스' 1권을 펼쳐들었다.
그렇게 여행은, 이미 시작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