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후에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인피니티 풀이었다.
수영장 끝이 바다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
투숙객들이 제법 있었다.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
물속에서 아이와 노는 가족들.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러시아어와 중국어가 섞여 들렸다.
한국어는 들리지 않았다. 왠지 편하기도 했다.
수경을 쓰고 물에 들어갔다.
간단히 몸을 풀고, 가민 시계를 셋팅한 후
수영을 시작하려는데 왠지 모를 시선이 느껴졌다.
풀 반대편에 서 있는, 검정 레시가드를 입은 덩치 큰 남자가
나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물속을 걸어서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나도 멈칫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 어딘가 낯익었다.
한참을 쳐다보고 나서야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순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김변호사였다. 부산에서 알고 지내는 후배.
"어, 신형아."
"아니. 여기 웬일이세요?"
"그냥. 쉬러 왔어."
그는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살이 많이 찌셨네요."
순간 창피했다. 수영복 차림이었으니까.
백 킬로그램이 넘는 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요즘 철인3종 안 하세요?"
"응. 좀 쉬고 있어."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몰라도,
내게 뭔가 개인적인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돌았을테니.
잘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가족이랑 왔어?"
"네. 아내랑 애들이랑요."
선베드 쪽에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평범한 가족 여행. 평범한 휴가.
"수영 계속하세요. 저는 애들 데리고 올라가야 해서."
그는 손을 흔들고 물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베트남 나트랑,
그것도 같은 호텔 수영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내게는 자주 일어난다.
몇 년 전 다낭에서는 길을 걷다가 친동생 가족과 마주친 적도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팔자가 기구한 걸까. 아니면 그냥 운이 그런 걸까.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수경을 썼다.
물에 들어가 천천히 팔을 저었다.
석 달 만의 수영이었다.
레인이 없는 인피니티 풀이라 거리를 재기가 어려웠다.
관리하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about twenty five meter'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냥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왕복하면서 대략 세었다.
처음 몇 바퀴는 숨이 금방 찼다. 폼도 엉망이었다.
팔이 물을 제대로 잡지 못했고, 발차기도 흐트러졌다.
하지만 조금씩 감각이 돌아왔다.
물의 저항을 느끼는 법. 숨을 쉬는 타이밍.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물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숨소리와 물이 갈라지는 소리만 있었다.
그 고요함이 좋았다.
생각이 단순해지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나아간다. 벽에 닿는다. 돌아선다.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만 반복하면 되었다.
지난 5년간 잃어버린 것들이 떠올랐다.
돈. 시간. 관계. 건강.
하나씩 손가락을 꼽을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슬프지는 않았다.
물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중력이 줄어들듯이, 감정의 무게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잃어버린 것들. 그것들은 이미 지나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대략 1킬로미터쯤 헤엄쳤을 때
풀 가장자리에 매달려 숨을 골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물 밖으로 나와 선베드에 누웠다.
하늘이 파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야자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렸다.
스피커에서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왔다.
'On the Beach'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눈을 감았다.
지난 석 달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잠이 오지 않아서. 생각을 멈추고 싶어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장소가 바뀌었을 뿐인데.
아침에 일어나서 달리고,
오후에 수영을 하고,
저녁에는 책을 읽었다.
술은 못생긴 호랑이가 그려진 Larue 맥주 두어 잔이면 충분했다.
왜 여기서는 되는 걸까.
왜 부산에서는 안 되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가끔씩 이곳으로, 혹은
이곳 같은 어딘가로 돌아와야 한다.
한 달에 한 번이든, 두 달에 한 번이든.
그래야 다시 숨을 쉴 수 있다.
끊긴 구간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때때로 멈춰 서서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선베드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 위로 해가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화상 미팅이 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시작할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나는 비행기에서 읽다 만 책을 집어 들었다.
댄스 댄스 댄스.
삼십 년 전 군대에서 처음 읽었던 책.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지금은 다르게 읽혔다.
삼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 책 속의 주인공과 지금의 내가
비슷한 곳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
하지만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는 사람.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졌다.
바다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