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한 통의 무게

감정은 다른 감정으로 덮인다

걱정이라는 건 묘한 물질이다.

손에 쥐면 쥘수록 무거워지고, 들여다보면 볼수록 커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전혀 다른 걱정이 생기면, 이전 걱정이 갑자기 가벼워진다.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무게가 느껴지지 않게 된다.


며칠 전 경험한 일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머리가 무거웠다.

특별히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그냥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 있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 만나야 할 사람, 정리해야 할 관계.

하나하나는 별것 아닌데, 뭉쳐 있으니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출근길에 혼자 중얼거렸다.

요즘 종종 그런다.

운전하면서, 혹은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듯 말을 내뱉는다.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고, 녹음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머릿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보는 것이다.




문제는 그 걱정들이

논리적으로 따져봤을 때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막상 하나씩 꺼내놓고 보면 대부분 해결 가능한 것들이다.

어떤 건 이미 해결된 것이고,

어떤 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내가 뭔가를 더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기다리는 게 제일 힘들다.


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는 괜찮다.

다음 단계가 명확하니까. 움직이고 있으니까.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해놓고 결과를 기다릴 때,

그때 이상하게 불안이 커진다.

손에서 놓아버린 공이 어디로 굴러갈지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그날도 그랬다. 손에 쥔 것 없이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미뤄두었던 일이 하나 있었다.

건강검진 예약.

별로 급한 건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잠깐 망설였다. 전화하기가 귀찮았다.

예약 시간을 조율하고, 일정을 확인하고,

그런 사소한 절차들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가만히 있기가 싫었다.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날짜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5분도 안 걸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전화를 끊고 나니 아침부터 무겁게 짓눌렀던 것들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거기 있다.

다만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대체 무슨 현상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전화 한 통이 뭘 해결한 건 아니다.

건강검진 예약이 내 다른 걱정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무 상관 없다.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기분이 달라졌다.


아마 이런 것 같다.

뭔가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기다리기만 하는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를 했다는 것.

그게 마음에 작은 숨구멍을 내준 것 같다.




예전에 어디선가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의 뇌는 멀티태스킹에 약하다고 했다.

여러 가지 걱정을 동시에 품고 있으면 모든 걱정이 커진다.

하지만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뇌의 주의가 그쪽으로 옮겨가면서 이전 걱정들이 배경으로 물러난다고.


전화 예약은 내게 새로운 자극이었던 셈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뭔가 다른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머릿속 풍경이 조금 바뀌었다.




그러고 보면 삶에서 비슷한 경험이 종종 있었다.


큰 걱정을 안고 있을 때, 의외로 작은 일들이 도움이 됐다.

서랍 정리를 한다든지, 오래된 메일함을 정리한다든지, 운동을 하러 간다든지.

그 일들이 원래 걱정을 해결해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회피'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다른 일로 덮는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쓸데없이 끙끙대는 것보다,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나씩 하는 게 낫다.

적어도 움직이고 있으니까. 멈춰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게 건강하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다.


내일은 뭘 해볼까.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그냥 작은 것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 뭐라도 하나씩 해보자.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기다리던 것들도 결국에는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걱정은 해결하는 게 아니라 덮는 것이다.

다른 걱정으로가 아니라, 작은 행동들로.

그 행동들이 쌓이면 어느새 걱정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게 된다.


전화 한 통의 무게가 때로는 수십 시간의 고민보다 무겁다.

5분짜리 행동이 며칠간의 불안을 눌러버리기도 한다.

이상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조금 무거웠다.


그래서 뭔가를 했다.

뭘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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