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습작] 새로운 첫날

썩은 빵을 먹은 남자

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12월 초였다.


파크 하얏트 부산 31층. 리빙룸 바.

가끔 나는 그곳에서 글을 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전면 유리창 너머로 광안대교가 보인다.

밤이 되면 다리 위로 차량들의 불빛이 흐른다.

12시가 넘으면 조명이 꺼지지만,

그 전까지는 도시의 맥박처럼 깜빡인다.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라이브 연주는 금요일에만 있지만,

평일에도 녹음된 피아노곡이 낮게 깔린다.

빌 에반스. 키스 자렛. 브래드 멜다우. 그런 류의 음악들.

나는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며 노트북을 두드린다.

바텐더는 나를 알아보지만 말을 걸지 않는다.

나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서로에게 편한 거리.


그 남자는 매일 밤 열 시쯤 나타났다.


카운터 끝자리에 앉아 버번을 두 잔 마시고 떠났다.

항상 같은 자리, 같은 술, 같은 양. 사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양복 차림이었지만 넥타이는 늘 풀어헤쳐져 있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고, 휴대폰을 보는 법도 없었다.

그냥 유리창 너머로 광안대교를 바라보다가, 술을 비우고, 돈을 내고, 나갔다.


나는 그가 궁금했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작가라는 직업의 나쁜 버릇 중 하나가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다.

하지만 관찰하는 것과 개입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관찰만 했다.

그의 굽은 어깨, 천천히 잔을 기울이는 손,

다리 위로 흐르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는 눈.


비가 내리던 어느 밤이었다.


그날따라 바에는 손님이 적었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광안대교의 불빛이 물에 번져 흐릿했다.

피아노곡이 바뀌었다.

사티의 짐노페디. 느리고 쓸쓸한 선율.


작가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저도 알아요.

여기서 뭔가 쓰시잖아요.

소설인가요.


네, 뭐 그렇습니다.


그가 빈 잔을 내려놓았다.


작가님, 썩은 빵을 먹어본 적 있습니까.




나는 노트북을 접었다.


남자는 바텐더에게 손짓해 버번을 한 잔 더 시켰다.

평소보다 한 잔 더.

무언가 달라진 밤이었다.


12년 전 일입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저는 배가 고팠어요.

비유가 아닙니다. 진짜로 굶주려 있었어요.

10년 넘게 하나의 목표만 향해 달렸거든요.

그 끝에 도착했을 때, 제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텅 빈 창고 같은 상태.

사회성도, 금전 감각도, 인간관계도.


남자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제 앞에 빵 하나가 놓여 있었어요.

썩은 빵이었습니다.

먹으면 탈이 날 걸 알았어요.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하지만 당장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드셨습니까.


네. 집어 들었습니다.


남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광안대교의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대가로 10년을 잃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가로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침묵의 가치다.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중간에 끼어들지 않는 것.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게 두는 것.


지난달에 전쟁이 끝났어요.


남자가 말했다.


4년 걸렸습니다. 10년 동안 번 돈이 전부 사라졌어요.

한 푼도 남지 않았습니다.


무슨 전쟁이었습니까.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혼이라는 이름의 전쟁. 그리고 이혼이라는 이름의 전쟁.

저쪽은 철저하게 준비했고, 저는 방심했어요.

단판 승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그는 잔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그런데 이상한 건, 억울하지가 않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미칠 것 같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냥 그런가보다 싶어요.

독소가 빠져나간 느낌이랄까요.




피아노곡이 바뀌었다.


드뷔시의 달빛.

유리창 너머로 광안대교의 조명이 천천히 색을 바꾸었다.

파랑에서 보라로. 보라에서 다시 파랑으로.


몇 달 전에 부모님을 만났어요.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10년 만이었습니다.

뭔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더군요.


뭐가요.


제 안에 있는 것들이요.

어릴 때 느꼈던 공포, 불안감.

사라진 줄 알았어요. 완전히 극복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을 만나자마자 똑같이 솟아올랐습니다.


남자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때 알았어요.

이건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무의식에 새겨진 것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다만 거리를 둘 수 있을 뿐이에요.





빗소리가 강해졌다.


유리창에 빗물이 흘러내리며 바깥 풍경을 일그러뜨렸다.

광안대교의 불빛이 물감처럼 번졌다.


대학 동창이 하나 있어요.


남자가 말했다.


졸업하고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습니다.

제가 힘들 때 많이 기댔어요.

고마운 마음에 이것저것 해줬습니다. 금전적으로도.

처음에는 서로 고마워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더군요.


남자는 잔을 천천히 돌렸다.


저는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해왔어요.

어려울 때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과도하게 퍼주고,

결국 관계가 망가지는.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그랬고,

결혼 생활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선을 긋기로 했습니다.

친구는 친구일 뿐이에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해요.

그래야 오래 갈 수 있습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마치고 문 앞에 섰다.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31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마린시티의 야경이 빗물에 젖어 흐릿했다.


작가님.


그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으시려는 거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맞았기 때문이다.


가늘고 길게 가려고요. 욕심을 버렸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어딘가로 떠날 생각이에요.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남자가 말을 이었다.


춤을 추려고요.


춤이요?


무라카미 하루키 아시죠. 댄스 댄스 댄스.

거기 이런 말이 나와요.


음악이 흐르는 한, 계속 춤을 춰라.

왜 춤을 추는지 생각하지 마라.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멈춘다.


남자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피아노 선율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12월 초였다."




그 후로 남자는 다시 바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다.

나는 바에 갈 때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카운터 끝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어딘가로 떠났을까. 아니면 다른 바를 찾았을까.

알 수 없었다.


새해 첫날 밤.


나는 버번을 한 잔 시켰다.

그가 마시던 술이었다.

잔을 들어 빈자리를 향해 가볍게 들어올렸다.


춤을 추고 계신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광안대교의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피아노 선율이 바뀌었다.

사티의 짐노페디가 다시 시작되었다.

느리고 쓸쓸한 선율. 비가 내리던 그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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