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하지 않는 법

뚜껑을 여는 연습

몇 해 전 일이다.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을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약속 장소에서 십오 분을 기다렸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 사람은 늘 십오 분씩 늦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그랬다.


그날도 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상대방이 도착했고,

우리는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또'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또 십오 분. 또 아무 말도 없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조용히 끓는 주전자'라고 부른다.

불 위에 올라간 주전자가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다가,

어느 순간 뚜껑을 덜그럭거리며 증기를 내뿜는 것처럼.

문제는 그 '어느 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

나 자신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 사람의 십오 분이 싫었다면 말을 했어야 했다.

"자꾸 늦으면 좀 곤란하다"고.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적어두었다.

장부에 기입하듯 하나씩 차곡차곡.

그렇게 쌓아두다가 장부에 빈칸이 없어지면,

그때서야 뚜껑이 날아간다.


상대방은 무슨 일인지 몰랐을 것이다.

전날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나중에 공통 지인에게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십오 분씩 늦은 것들을 나열하는 일이 옹졸하게 느껴졌다.





어디서 이런 습관이 생겼을까.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교실 청소 당번을 정하는 날이었다.

담임이 일방적으로 나를 지목했다.

이미 지난주에도 했는데, 또 내 차례라고 했다.

참다 못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저 지난주에도 했는데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답이 아니라 호통이었다.

"선생님이 하라면 해."


그날 배운 것이 있다.

말해봐야 달라지지 않는다.

말하면 오히려 나만 손해다.

입을 다물어라. 참아라.


그 교훈은 오랫동안 유효했다.

적어도 유효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주전자는 결국 끓는다.

참으면 참을수록 압력은 높아진다.

뚜껑이 날아가고 나면 이미 늦다.


몇 달 전, 비슷한 상황이 또 생겼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이번에도 참았다가 반년 뒤에 관계를 끊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한마디 할 것인가.


그래서 말해보기로 했다.


"해주고 화내지 말자. 화나지 않을 만큼만 하자."


이것은 이기적으로 살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정도의 문제다.

어디까지 해주면 기분이 상하지 않는지,

그 지점을 찾는 것이다.

선을 넘는 부탁에는 "그건 좀 어렵겠다"고 말해야 한다.

말하면 관계가 어색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반년 뒤에 뚜껑이 날아가는 것보다는 낫다.




며칠 전, 아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간 맞추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알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속으로 장부에 한 줄 적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날은 좀 어렵겠다."


상대방은 잠깐 멈칫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그래, 알겠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관계가 무너지지 않았다.

나도 화가 나지 않았다.

장부에 적을 것이 없었다.


작은 일이었다.

그러나 오십 년 가까이 살면서 처음 해본 일이기도 했다.




주전자는 불 위에서 끓기 마련이다.

다만 뚜껑을 조금씩 열어두면 증기가 새어 나간다.

압력이 쌓이지 않는다.


말하는 것이 뚜껑을 여는 일이다.

거창한 대화가 아니어도 좋다.

"그건 좀 어렵겠다."

그 한마디면 충분할 때가 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배우고 있다.

예순이 되기 전에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오십이 되어서야 겨우 알았다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뚜껑을 열어본 뒤의 어색한 침묵이,

뚜껑이 날아간 뒤의 텅 빈 적막보다는 나았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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