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무게에 대하여
찬물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며칠 전 퇴근 후, 멍한 상태로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켰다.
1분, 2분. 물은 여전히 차가웠다.
밖으로 나와보니 분전함—흔히 두꺼비집이라고 부르는—차단기 하나가 내려가 있었다.
수년을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차단기를 올리고, 포트에 물을 올린 후 다시 샤워를 했다.
샤워 중에 밖에서 묘한 소리가 났다.
'펑'과 '뻑'의 중간쯤 되는 소리.
샤워를 마치고 나와보니 포트가 고장 나 있었다.
전원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5시 30분. 격렬한 배고픔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이렇게 배가 고픈 건 처음이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반찬을 꺼내고, 된장국을 끓이고, 즉석밥을 데웠다.
세척 샐러드도 볼에 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나도 몰랐다.
밥도 국도 뜨거웠기에 샐러드를 먼저 집어 입에 넣었다.
'딱'
이빨에 충격이 느껴졌다. 작은 돌멩이 같은 이물질.
입을 씻어낸 후 다시 집었다. 또 돌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집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된장국 그릇이 쏟아지며 국물이 식탁 위로 퍼졌다.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더 먹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집에 있을 기분이 아니어서 밖으로 나왔다.
무작정 광안리 해안 쪽으로 걸었다.
주말 새벽. 영하의 바람이 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별거 아니다.
퓨즈가 나갈 수도 있고,
포트가 고장 날 수도 있고,
샐러드에 이물질이 들어갈 수도 있다.
국을 쏟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묘한 공포감이 밀려온다.
개인적으로 귀신 같은 건 믿지 않는다.
나쁜 우연이 수차례 겹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뭔가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평소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쉽게 흔들릴 줄은 몰랐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마 후 나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30분 후 집으로 돌아왔다.
'꽝'
문을 열려던 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복도에 넘어졌다.
우연이란 건 참 이상하다.
각각의 사건들은 독립적이고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패턴을 찾으려 한다.
연속된 불운 앞에서 '왜?'라고 묻게 된다.
논리적으로는 그냥 나쁜 운이 겹친 것일 뿐인데,
감정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확률적으로 따지면 이런 날도 있게 마련이다.
동전을 수만 번 던지다 보면 열 번 연속 앞면이 나오는 날도 있다.
인생도 그렇다.
아마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우연에서 필연을 읽으려 하고,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를 떠올리면
진짜 뭔가 있었던 건 아닐까.
지금도 가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