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습작] 간이역

아직은 아니다

그 해 가을,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은행 계좌의 잔고가 바닥나고,

이혼 서류에 마지막 도장을 찍은 날로부터

정확히 열흘이 지났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누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빈 의자들을 바라보며

의외로 울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슬픔과는 다른 종류의 감각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등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갑자기 내려놓았을 때의 허탈함 같은 것.

어깨가 가벼워졌는데도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은,

그런 기묘한 불균형.


장례를 치르고 나흘이 지나 나는 아무 목적 없이 기차를 탔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기차는 북쪽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논밭이 지나가고, 작은 마을이 스쳐갔다.

승객들이 하나둘 내리고,

어느 순간 객차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지만 음악은 틀지 않았다.

그냥 바깥 소리를 차단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틀었던 찬송가가 아직 귓가에 맴돌았다.

그 멜로디를 다른 음악으로 덮어쓰고 싶지 않았다.


해가 기울 무렵 기차가 작은 간이역에 멈췄다.


역 이름을 적은 낡은 표지판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글자는 읽히지 않았다. 페인트가 오래전에 벗겨진 탓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렸다.

그냥 내려야 할 것 같았다.


대합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낡은 나무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고,

구석에 자판기가 하나 서 있었다.

자판기의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바늘이 멈춰 있었다.

아마 오래전부터 멈춰 있었을 것이다.

이 역에서 시간이란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동전을 넣고 커피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종이컵에 커피를 따랐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오랫만에 마시는 믹스커피.

저렴한 단 맛이었지만, 목을 넘어가는 감촉만큼은 분명했다.


어딘가에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다가 곧 끊겼다.


그때 왼쪽 다리에서 저림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발끝에서부터였다.

마치 수천 마리의 작은 무언가가

피부 아래를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점점 위로 올라왔다.

발목을 지나 종아리로, 무릎을 넘어 허벅지까지.

나는 바지 위로 다리를 문질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림이 심해질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대합실 바닥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형체는 없었다. 소리도 없었다. 그저 느껴질 뿐이었다.


거대하고 검은 것이 서서히 솟아오르고 있다는 확신.


나는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다만 외면해왔을 뿐이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내가 평생에 걸쳐 눈감아온 것들.

말하지 않았던 것들.

느끼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


결혼 생활 동안 쌓여갔던 침묵.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흘리지 않았던 눈물.

어머니에게 한 번도 하지 못한 사과.


그 모든 것들이 형태 없는 덩어리가 되어

바닥 아래에서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외투를 벗어 던졌다고 해서 피부에 스며든 것까지 지울 수는 없다.

그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인 것처럼.



나는 눈을 떴다.


대합실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라진 것 같았다.

공기의 밀도가, 빛의 각도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일어서려고 했다.

왼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저림이 마비로 바뀌어 있었다.

무릎 아래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허벅지를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했다.

한 발을 내딛자 균형을 잃고 의자 등받이를 붙잡아야 했다.

바닥 아래의 것이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 자리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졌다.


나는 다리를 끌며 대합실 문 쪽으로 움직였다.

왼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조금씩 물렁해지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 공기가 차가웠다.

하늘은 보랏빛에서 검은색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별이 하나 보였다. 아니, 두 개. 몇 개 더 보였다.

플랫폼에 서자 다리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대합실에서 멀어지자 그 느낌도 함께 옅어졌다.

검은 것은 여전히 거기, 바닥 아래 어딘가에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나를 따라오지 않는 것 같았다.


플랫폼 끝까지 걸어가 보았다.

선로는 양쪽으로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오른쪽이 내가 온 방향이고, 왼쪽이 내가 가야 할 방향일 것이다.

다음 기차가 언제 오는지 묻고 싶었지만, 역무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역에는 애초에 역무원 같은 것이 없을 수도 있다.

그냥 여기에 대합실이 있고, 저쪽에 플랫폼이 있고, 가끔 기차가 오고 간다. 그뿐인 것이다.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기적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했다.

아주 낮은 주파수의, 거의 들리지 않는 진동.


나는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

4박자. 느린 4박자.

나는 플랫폼에서 내려와 선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리에는 아직 저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대합실 안에서보다 나았다.

발이 자갈을 밟는 감촉.

바람이 뺨을 스치는 감각.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를 현실에 붙들어두고 있었다.


저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불편함만이 내가 아직 땅 위에 서 있다는 증거였다.


걷다 보니 리듬이 생겼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저림이 있는 왼쪽 다리를 디딜 때마다

미세한 통증이 발바닥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그 통증에 맞춰 걸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4박자의 진동에 발을 맞추듯이.


어릴 때 어머니가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던 적이 있다.

오래 배우지는 못했다. 재능이 없었고, 흥미도 금방 잃었다.


하지만 메트로놈 소리만은 기억났다.

똑, 똑, 똑, 똑. 그 기계적이고 무심한 박자.

어머니는 그 소리에 맞춰 내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주었다.


지금 내가 걷는 리듬이 그것과 비슷했다.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아주 작은 점. 움직이고 있었다.

기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계속 걸었다.

불빛은 점점 가까워지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다. 깜빡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간이역의 대합실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였다.

그 아래, 바닥 아래 어딘가에 검은 것이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시 마주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마지막 한 개비였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연기가 폐를 채우고, 천천히 빠져나갔다.


이어폰은 아직 주머니에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아직은 음악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우고 꽁초를 선로 위에 떨어뜨렸다.

불씨가 잠깐 빛나다 꺼졌다.


나는 다시 걸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저림은 여전했지만, 그것도 하나의 박자였다.


이어폰 속 음악은 아직 듣지 못하지만,

내 다리는 여전히 박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메트로놈 소리. 아버지가 틀던 오래된 팝송. 장례식장의 찬송가.

그 모든 음악이 멈춘 지금도, 발걸음만은 계속되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걷는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했다.

적어도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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