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있는 시련에 대하여
오래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나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어렸을 때 처음 그 말을 접하고,
나는 꽤 오랫동안 그것을 믿었다.
시험이 다가오면 일부러 자신을 궁지로 내몰았고,
막다른 골목에 서야 비로소 뭔가가 되리라 생각했다.
토요일 아침의 수영 수업은 평일과 분위기가 다르다.
휴일이다 보니 출석률이 낮다.
열다섯 명이 오던 레인에 대여섯 명만 선다.
사람이 적으면 대기 시간이 줄고, 수영할 시간이 늘어난다.
한마디로 평일보다 훨씬 힘들다.
게다가 토요일에 굳이 나오는 사람들은
수영에 진심인 사람들이다.
실력도 체력도 한 수 위다.
줄을 지어 자유형을 하면,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의 물살이 발끝에 닿는다.
간격이 벌어지면 괜히 뒷목이 뜨거워진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나도 나름 바짝 긴장하면서 팔다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매번 벽을 찍고 돌아설 때마다 뒷사람과 부딪혔다.
한 명 뒤로 물러서서 다시 출발했다.
그다음 사람과도 부딪혔다. 또 물러섰다.
그렇게 계속 자리를 옮기다가 결국 맨 마지막에서 수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내가 25미터를 채 끝내기도 전에,
맨 앞 사람이 이미 다음 턴을 시작하고 있었다.
레인 안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물살이 엉키고, 팔이 부딪히고, 숨 쉴 타이밍을 놓쳤다.
나는 레인 밖으로 나왔다.
강습 중간에 레인을 빠져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힘든 날이라도 끝까지 버텼다.
요령을 피운 적은 있어도, 아예 포기한 적은 없었다.
레인 가장자리에 서서 물 밖에서 수업을 바라보았다.
수강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왕복하고 있었다.
숨이 고르지 않았다.
부끄러움 같은 것이 잠깐 올라왔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래전 그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극한 상황이 초인적인 힘을 끌어낸다는 말.
젊었을 때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시험 전날의 벼락치기, 마감 직전의 집중력.
그런 것들은 분명 벼랑 끝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벼랑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노력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답이 있었다.
그런 종류의 압박은 사람을 키운다.
오늘 수영장에서 경험한 것은 그것과 달랐다.
매 턴마다 부딪히고, 뒤처지고, 눈치를 보는 상황이 반복되자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가 생기기보다는,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먼저 올라왔다.
극한이 초인적인 힘을 끌어낸 게 아니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불러온 것이다.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절벽의 높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한 뼘 높이의 턱이라면 새끼 사자도 기어오를 수 있다.
하지만 열 길 낭떠러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늘 나는 레인을 빠져나왔다.
해냈다는 뿌듯함도 없고, 포기했다는 자괴감도 딱히 없다.
다만 하나, 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된 기분이다.
감당할 수 있는 시련과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같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전혀 다른 것이라는 감각.
다음 토요일에도 수영장에 갈 것이다.
다만 오늘과 같은 상황이 온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레인을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버티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