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문이 열리기 전

시험처럼 시작되는 하루에 대하여

월요일 아침, 나름대로

하루의 흐름을 정리해 두고 출근했다.

밀린 글을 써야 했고,

여행을 앞두고 처리할 일들도 있었다.

출근길에 머릿속으로 하루를 쪼개 놓았다.

서면 하나, 글 하나, 행정 업무 몇 가지.


사무장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급한 상담이 들어왔다고.

한 시간 반 뒤에 잡혀 있다고.


답을 안 할 수도 없다. 일정을 지웠다.


상담실 문이 열리기 전, 나는 항상 긴장한다.


시험과 비슷하다.

다만 준비된 문제가 아니다.

자료가 미리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문이 열리고 의뢰인이 앉는 순간부터

문제지가 배부된다.

채권 회수가 가능한가요.

소송을 하면 이길 수 있나요.

상대방이 재산을 빼돌린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질문이 쏟아지고,

그 자리에서 바로 답을 해야 한다.


답 하나에 돈이 걸려 있고, 감정이 걸려 있다. 의뢰인에게 이 상담은 인생의 방향이 갈리는 순간이다.

가능성이 낮으면 낮다고 해야 하고,

모르는 영역이면 모른다고 해야 하는데,

그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기술을 요구한다.

희망을 줘서도 안 되고, 희망을 꺾어서도 안 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정확한 지점이 있는데,

매번 그걸 찾아야 한다.


서면을 쓰는 일은 밤을 새워도 견딜 수 있었다.

자료를 읽고, 논리를 세우고, 문장을 다듬는 과정은 혼자만의 시간 안에서 통제가 가능했다.

상담은 전혀 달랐다.

상대방이 있고, 상대방의 감정이 있고, 그 감정에 반응하면서도 전문가로서의 판단을 유지해야 했다. 끝나고 나면 몸이 축 늘어졌다.

정신적 피로라기보다는 온몸의 에너지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감각에 가까웠다.

어떤 날은 상담 후에 사무실 소파에 누워서 십 분 정도 천장을 보고 있어야 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래야 다음 일을 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줄이기 위해

십 년에 걸쳐 시스템을 만들었다.

급한 상담을 줄이고, 사전에 자료를 요청하고,

채권 회수·파산·회생, 이 세 영역으로 업무를 좁혔다. 예전처럼 아무 상담이나 받아서 밤새 자료를 찾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남는 변수는 사람이다.

사전에 자료를 보내달라고 해도 빈손으로 오는 사람이 있고, 예약을 잡아놓고도 연락 없이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시스템은 확률을 줄여줄 뿐, 변수를 없애지는 못한다. 그걸 십 년 걸려서 알았다.


그날도 상담이 하나 잡혔다가 의뢰인이 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 비워둔 시간이 그대로 빈 시간으로 남았다. 이미 다른 일정을 밀어둔 뒤라서 그 시간을 다시 쓰기도 어려웠다.


예전 같았으면 화가 났을 것이다.

겉으로는 참았지만 속에서는 계속 끓었다.

왜 내 시간은 항상 다른 사람의 사정에 의해 밀려나는 건지. 그런 생각들이 하루 끝까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날은 조금 달랐다.

의뢰인이 안 온 걸 확인하고, 잠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커피를 내렸다. 핸드드립으로 천천히. 내리는 동안 다음에 뭘 하면 될지를 생각했다.

밀린 서면이 하나 있었다. 그걸 꺼냈다.

화가 올라오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인 셈이다.


좋게 생각하려고 애쓴 건 아니었다.

억지로 참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이게 평온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예전처럼 화를 내고, 그 화를 낸 자신에게 다시 지치고, 그 지침이 다음 날까지 이어지던 순환은 거기서 멈췄다.


여행이 이틀 앞이었다.


D-2쯤 되면 늘 비슷한 상태가 된다. 마음이 풀린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데 이상하게 흐트러진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고, 찬장을 열었다. 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갔다. 봉지를 뜯기 직전에 멈췄다.

멈춘 것이 아니라 멈춰진 것에 가까웠다.

봉지를 든 채로 잠깐 서 있었다.

지금까지 잘 지켜온 것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이, 어디서 많이 겪어본 순간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결국 라면을 끓였는지 안 끓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봉지를 든 채로 잠깐이라도 서 있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뜯고 끓이고 먹고 나서야 ‘아, 또 그랬구나’ 했다. 지금은 뜯기 전에 알아본다. 완전히 막지는 못해도,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안다.


알고 무너지는 것과 모르고 무너지는 것은 다르다. 결과는 비슷해 보여도, 무너진 뒤에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게 충분한 건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문이 열리기 전의 나를 조금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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