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어디를 보고 있는 말인가?

몇 년 전, 지인 한 명과 저녁을 먹었다.

말수가 적은 편인데 그날은 달랐다.

오래 사귄 사람 얘기를 꽤 길게 했다.

대화가 없고, 같이 있어도 불편하고,

이 관계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별말 하지 않았다.

그가 답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헤어지면서 그가 말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뭔가 이상했다. 한참 걸어서야 알았다.

그 말은 지금에 관한 말이 아니었다.


나이 들면, 몸이 아프면, 혼자가 되면.

그 말 안에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이 들어 있었다.

지금 불편하고 외로운 것은 일단 옆으로 밀어두고,

언젠가의 가능성을 담보로 지금을 버티는 것.

그렇게 읽히자 그 말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위로처럼 시작해서 거래처럼 끝나는 말이었다.


그 논리를 완전히 틀렸다고 하긴 어렵다.

나이 들어 곁에 사람이 있다는 건 실제로 좋은 일이다.

다만 그건 서로 기댈 수 있는 사이일 때의 얘기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사람이,

상황이 달라지면 달라질 거라는 기대.

나는 그 기대의 근거를 아직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지인을 다시 만난 건 한참 뒤였다.

관계는 여전했다.

그는 또 비슷한 말을 했는데,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엔 목소리가 낮았다는 것이다.

처음엔 확인을 구하는 것처럼 들렸던 말이,

이제는 그냥 습관처럼 들렸다.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처음엔 분명히 불편했던 것이

어느 시점부터 그냥 일상이 된다.

그리고 그 일상이 안정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

사람은 그것을 잃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된다.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는 것이다.

관계가 아니라 상실 자체가.


그 지인과는 이후 연락이 뜸해졌다.

잘 지내는지 모른다.


다만 그 말은 여전히 기억한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람은 지금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지 않은 어딘가를 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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