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항상 열려 있으면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건 특별한 순간이 아니었다.
다툰 것도 아니었다. 큰 말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날 문득, 이 사람이 너무 쉽게 내 방에 들어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와서 눕고, 먹고, 빈둥거리고,
그러다가 내가 하는 일에 한마디씩 얹는다.
말투는 가볍다. 오래 알았으니까.
너무 오래 알았으니까.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 가벼움이 편했다.
뭐든 말할 수 있었고, 설명하지 않아도 됐고,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오래된 관계가 주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게 반대 방향으로도 작동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이쪽에서도 무게를 싣지 않게 된다.
아무 때나 들어와도 되는 공간이 생기면,
들어오는 사람만 가벼워지는 게 아니다.
그 공간 자체가 가벼워진다.
어느 날 저녁, 몸이 좋지 않아서 일찍 들어왔다.
내일 해줄게, 라고 했는데 험한 소리가 돌아왔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이 공간이 그만큼 가벼워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항상 열려 있으면 노크를 안 하게 된다.
오래된 관계에서 받는 상처는
낯선 사람한테서 받는 것과 다르다.
낯선 사람의 말은 흘려보낼 수 있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그러니까 저 말은 나에 대한 말이 아니다.
그렇게 처리된다.
하지만 오래 알아온 사람의 말은 다르다.
그 사람은 나를 안다. 그러니까 그 말이 진심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자리를 잡으면 잘 지워지지 않는다.
역설이다. 가까울수록 더 잘 다친다.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 서로의 말에 무게가 생긴다.
자주 보면 말이 가벼워지고, 덜 보면 할 말이 쌓인다.
할 말이 쌓인 사람들이 만날 때 대화는 다른 밀도를 갖는다.
나는 그걸 뒤늦게 알았다.
비밀번호를 아직 바꾸지는 않았다.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냥 그런 생각이 있었다.
오늘도 방 안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리모컨을 들고 누워서, 별 의미 없는 화면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옆을 지나 책상에 앉을 것이다.
아무 말도 안 할 것이다.
숫자 네 개를 바꾸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인데,
자꾸 다음으로 미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