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 죽겠지만 차마 버릴 수 없는 '아픈 손가락'
0.
나는 부산이 본적이고
부산에서 초, 중, 고를 나왔고
지금도 부산에서 살고 있다.
1.
어렸을 때 나는 야구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당시 부산에서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가족들만 해도 나(와 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아버님과 동생들 모두 매일매일 아침인사처럼
전날의 롯데 자이언츠의 승패를 물었으니.
2.
요즘은 모르겠으나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주중에는 밤 10시까지 소위 '자율학습'이란 걸 했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즈음이었나? 정확하진 않지만
롯데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에 나갔던 모양이었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우들이
라디오로 롯데 야구 중계를 듣고 있었다.
감독하는 선생님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교무실에서 다들 야구를 보셨단다)
그러던 중 애들이 '와~'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롯데 선수 중 누군가가 역전 홈런을 쳤던 모양이다.
흥분한 학우들은 고함을 지르며 복도로 뛰어나갔고
감독하던 선생님들도 역시 복도로 뛰어나와
학생들과 감동의 포옹을 하는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물론 짧은 포옹 후 선생님들께서는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 애들을 교실로 밀어 넣으셨지만.
지금 보니 그게 롯데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3.
대학시절 가끔 부산에 내려오면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과'여서
친구들의 대부분이 '공대생'이었다.
그때 애들이 내게 알려준 것이
부산지역 공대생들은 하루에 3마디를 한다. 그것은
'밥 먹었나' , '이 문제 풀었나'
그리고
'롯데 이겼나?'
솔직히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애들은 왜 이렇게 롯데에 미쳐있을까?
맨날 욕만 하면서. 다시는 안 본다면서. 야구단 없애라면서.
4.
2010년은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던 시기였는데
그때부터 나도 '롯데야구'를 보기 시작했다.
당시 '제리 로이스터'라는 외국인 감독이 이끌고 있었는데
'No fear'라는 슬로건이 왠지 마음에 쿡 박혔기 때문이다.
그해 롯데는 정말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는데
두산베어스와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이대호가 홈런을 쳤었고, 나는 너무 기뻐서 목놓아 울어버렸다.
그때 뭐랄까. 뭔가 살아갈 용기 같은 걸 얻었던 것 같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기억이다.
5.
모든 부산사람이 '롯데야구'를 매일 보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나처럼 야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이라던가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면
부산은 확실히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도는 높은 것 같다.
부산사람들을 만났는데 딱히 할 말이 없다면
'롯데자이언츠'이야기를 꺼내면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80% 이상의 확률로.
특히 40대 이상 '남성'의 경우는 확률이 더 높아진다.
우리 사무실만 보아도 40대-50대 남성들과
20-30대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업무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한 주제가
바로 '롯데야구'일 정도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데자이언츠'라는 팀의 성적은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이다.
프로야구가 생긴 지 42년이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팀명칭이 유지되는 유'이'한 팀 중 하나인데
우승 횟수는 고작 2번뿐이다.
7년간의 암흑기 동안의 등수를 나타내는 '8888577'은
웬만한 내 나이 부산남자들은 다 외우고 있을 정도.
인사처럼 주고받는 '롯데 이겼나'는 대부분
'롯데자이언츠'에 대한 욕으로 이어진다.
과거에는 야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많았다.
7.
롯데자이언츠는 최근까지도 성적이 좋지 못했다.
그러다가 올해, 2025년. 어쩐 일인지 성적이 상위권이 되었다.
2등도 했다가, 3등도 했다가. 이게 꿈인지 생신지 원.
이렇게 롯데 성적이 좋을 때 부산은 난리가 난다.
무슨 유행처럼 다들 야구장으로 달려간다. 그래서
야구티켓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다.
우리 사무실도 지난달 다 같이 사직구장에 갔었는데
티켓예매를 몇 번이나 실패해서
결국 당근에서 장당 2-3만 원씩의 웃돈을 주고
티켓을 구매해서 관람했다.
8.
내 경우, 일이 바쁘기도 하고
최근 몇 년 롯데 자이언츠의 나쁜 성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기에
웬만하면 경기 자체를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나도
전날 승패와 순위 정도는 체크한다. 습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올해는 성적이 좀 좋다.
봄이 지나면 성적이 떨어져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아. 기대하면 안 되는데. 저러다가 성적 나쁘면 또 상처 입는데.
참으로 복잡한 심정으로 매일매일 승패와 순위를 확인한다.
9.
그런데... 9연패????
10경기 성적이 1무9패????
하아....라고 내가 한숨을 쉬니
같이 이야기하던 사무실직원들도 모두 한숨을 쉰다.
그 뒤 약 5분간 사무실 전 직원이 롯데의 욕을 했다.
저딴 팀은 진짜 해체시켜야 한다고.
그리고 또 내일 같은 질문을 반복하겠지.
롯데 이겼나?
그러다가 한번 이기면 또 야구장 티켓 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고.
무척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일단 나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이런 행태를 보인다.
부산사람들이라 그런 것 같다.
10.
사무실에 근무하는 모대리님(여성)은
스스로를 '승리요정'이라고 칭한다.
자기가 야구장을 가면 항상 롯데가 이겼기 때문이라고.
아무래도 이 분을 야구장으로 보내야겠다.
11.
롯데야.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