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그 날은 결국 온다.

시간이 선물한 여유와 깨달음

매일 아침, 사무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법인 전체 일정을 훑어보며 추가되거나 변동된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이다.

10년 넘게 일하며 쌓아온 습관이다.

처음엔 꽤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캘린더를 넘기며 사건들과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하루, 일주일, 한 달 뒤의 퍼즐이 맞춰진다.


그런데 오늘, 익숙한 루틴 속에서 한 사건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주로 다가온 민사사건의 변론기일. 순간, 가슴이 살짝 내려앉았다.

이 사건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우리가 원고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피고가 여러 명이라 송달 과정부터 꼬였다.

게다가 재판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몇 번이나 바뀌며 2년 넘게 질질 끌어왔다.

그러다 올해 초, 새로 배정된 재판부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양측 모두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줄 테니, 다음 변론기일에는 사건을 종결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지정된 날짜는 무려 5개월 뒤였다.

보통 민사사건 1심에서 변론기일이 한 달에서 한 달 반 간격으로 잡히는 걸 고려하면,

이건 파격적인 시간이었다.


그때 캘린더에 일정을 입력하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시간이 정말 넉넉하네.”

한숨 돌리는 기분이었다.

사건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였고, 피고 측은 별다른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후로 이 사건은 머릿속에서 살짝 멀어졌다.


매일 일정을 확인하면서도 그 날짜는 늘 멀게만 느껴졌다.

캘린더를 볼 때마다 3일 뒤, 일주일 뒤, 한 달 뒤의 빽빽한 일정들 사이에서,

5개월 후라는 숫자는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먼 미래처럼 보였다.

가끔은 ‘이 날이 정말 올까?’라는 낯선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바다 건너 어딘가의 섬처럼, 언젠가 가야 할 곳이지만 지금은 실감 나지 않는 그런 느낌.


그 5개월 동안 나는 다른 사건들로 바빴다.

법정에 서고, 의뢰인과 상담하고, 서류를 검토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건은 늘 머릿속 한구석에서 희미하게 맴돌았다.

걱정이랄 것도 없었다. 이미 준비는 끝났으니,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초조하게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 넉넉한 시간 덕에 잠시나마 사건의 무게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복잡한 사안에 얽매여 있던 마음이, 잠깐이나마 자유로워진 듯한 기분.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마치 바쁜 일상 속에서 뜻밖의 휴식 시간을 선물받은 것 같은 묘한 해방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캘린더는 어느새 다음 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날이 왔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이 정말로 다가왔다.


재판 날짜를 확인한 순간,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약간의 긴장, 약간의 허탈함,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어떤 깨달음.

그래, 아무리 멀게 느껴지던 날도 결국은 온다.

피하고 싶거나, 미뤄지고 싶거나, 심지어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시간 앞에서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50년을 살며, 변호사로 10년 넘게 일하며, 나는 이런 순간을 숱하게 마주했다.

마감 기한, 중요한 재판, 예상치 못한 결과들.

때로는 그 날이 오는 게 두렵거나 부담스러웠지만,

결국 모든 날은 제자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깨달은 건,

그 날을 피하려 애쓰거나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날이 올 것을 받아들이고, 그 사이의 시간을 충실히 보내는 게 중요하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5개월이라는 시간은 내게 준비 이상의 것을 선물했다.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주었고, 동시에 그 여유 속에서 사건을 다시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다음 주 재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는 그 시간을 충실히 보냈다고 믿는다.

서류를 다시 검토하고, 의뢰인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법정에서 할 말을 정리하며.


그 과정에서 나는 또 한 번 배웠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날들이 있다.

그리고 그 날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게,

어쩌면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가장 충실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날은 온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날도, 두려운 날도, 기대되는 날도.

중요한 건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그 시간을 채워나가느냐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캘린더를 넘기며, 다가올 날들을 준비한다. 담담히, 그리고 충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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