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고민'이라는 단어의 무게

메뉴 선택부터 인생의 갈림길까지, '고민'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작은 선택, 큰 단어

사무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늘 반복되는 의식이 있다. 동료들과 모여 오늘 뭘 먹을지 정하는 시간.

누군가는 제육볶음 도시락을 원하고, 다른 누군가는 통삼겹살 도시락을 선호한다.

그리고 꼭 한 명쯤은 이런 말을 한다.


"아, 뭐 먹을지 정말 고민되네."


그날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메뉴판을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던 중, 막내 직원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고민이에요. 제육이냐 삼겹살이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민이라니. 점심 메뉴 선택이 과연 '고민'일까.


진짜 고민을 만나다

며칠 뒤 우연히 대학 동창을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엔 그늘이 져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안부를 묻자,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즘 회사 일로 고민이 많아. 중요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방향을 못 잡겠어."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눈가에 피로가 묻어났고, 말투에도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것도 내가 생각하는 '진짜 고민'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법정에서 마주한 무게

이번 주 목요일, 나는 한 의뢰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판결문을 손에 든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

일단 집행유예가 나와서 구속은 면했다.

하지만 무죄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징역형 전과자가 된다는 현실이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변호사님, 항소를 해야 할까요? 정말... 고민됩니다."


그가 '고민'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나는 그 무게를 실감했다.

이 선택은 그의 인생을 좌우할 것이다.

항소를 하지 않으면 전과자가 되고, 항소를 하면 더 무거운 형을 받을 위험도 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전을 펼치다

집에 돌아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이토록 쉽게 쓰는 '고민'이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는 뭘까.

국어사전을 펼쳤다.


고민(苦悶): 괴로워하고 애를 태움


한자를 보니 더 명확했다.

쓸 '고(苦)'자에 번민할 '민(悶)'자.

글자 그대로 '괴롭게 번민하는 것'이다.


점심 메뉴 선택이 과연 '괴롭고 애가 탈' 일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이 무거운 단어를 꺼내 쓴다.


언어가 만드는 현실

언어학에는 '사피어-워프 가설'이라는 이론이 있다.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이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가설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작은 선택의 순간마다 '고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혹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일들까지도 무겁고 괴로운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의 '고민' 돌아보기

이번 주는 유난히 업무의 '난이도'가 높았다.

복잡한 계약서 검토, 까다로운 의뢰인과의 상담, 예상치 못한 법적 이슈들.

나는 수시로 "고민스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 조항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네."

"의뢰인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됩니다."

"이 사안을 어떻게 접근할지 정말 고민이에요."


하지만 이 글을 쓰는 금요일 오후,

한 주를 돌아보니 그것들이 정말 '괴롭게 애가 탈' 정도의 일이었나 싶다.

어려웠던 것은 맞지만, 고민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가벼운 것들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더 피곤하게 만든 건 아닐까.


말의 무게를 아는 것

변호사로 일하며 배운 것 중 하나는 말의 무게다.

법적절차에서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그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과실'과 '중과실', '상해'와 '중상해'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무거운 단어들을 꺼낸다.


'고민', '스트레스', '우울', '트라우마'.

이런 단어들이 일상 대화에서 얼마나 가볍게 소비되는지 생각해 보면 씁쓸하다.


진짜를 위한 여백

어쩌면 우리가 작은 일에도 '고민'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진짜 고민을 마주했을 때 쓸 단어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점심 메뉴 선택도 고민이고,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도 고민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법률 용어에는 '경미한', '중대한', '현저한' 같은 수식어가 있다.

같은 위반이라도 그 정도를 구분하기 위해서다. 일상 언어에도 이런 구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점심 메뉴는 '선택'이고, 보고서 작성은 '과제'이며, 항소 여부야말로 진정한 '고민'이 아닐까.


가벼운 말, 가벼운 삶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가 내뱉는 말이 현실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고민'이라고 부르는 우리는, 스스로 삶을 더 무겁고 괴롭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신중하게 사용해야겠다. 진짜 괴롭고 애가 타는 순간을 위해 그 단어를 아껴두기로 했다.

점심 메뉴? 그건 그냥 '오늘의 즐거운 선택'이다. 보고서 작성? '이번 주의 도전'이면 충분하다.

진짜 고민이 찾아왔을 때, 그때 비로소 그 무거운 단어를 꺼내 쓸 것이다.

그리고 그 무게만큼 진지하게 마주할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오늘도 사무실에서 누군가 말한다.

"커피를 마실지 차를 마실지 고민이야."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건 고민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해야지."


어쩌면 우리 삶이 조금 더 가벼워질 수 있는 비결은,

무거운 단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민은 고민답게, 선택은 선택답게.

각자의 무게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40대 후반(아직은 그렇다)을 살아가며 깨닫는다.

인생에서 진짜 고민할 만한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은 그저 선택이고, 결정이고, 때로는 작은 망설임일 뿐이다.


그러니 오늘부터라도 말의 무게를 재어보자.

그것이 정말 '고민'인지, 아니면 그저 일상의 작은 선택인지.

그 구분이 명확해질 때, 우리 삶도 한결 명료해질 것이다.



P.S.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금요일 오후 5시에 재판을 잡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판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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