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1달째, 나를 만나다

고마해라. 많이 먹었다이가.

목요일 밤 10시. 퇴근 후 강의를 하나 듣고,

사우나에 갔다가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아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시며

오랜만에 나를 마주한다.

술을 끊은지 꼭 한달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애주가'라 칭했다.

일본의 하이쿠 였던 것 같은데

'내가 죽으면 술독 밑에 묻어줘.

혹시 몇 방울 떨어질지 모르잖아' 라는 구절을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을 정도


학생 때는 물론이고, 직업을 가지게 된 이후에는

퇴근 후 습관처럼 술을 마셨다. 부끄럽지만.

피로를 핑계로, 스트레스를 핑계로.

맛있는 음식을 핑계로. 반가운 친구를 핑계로.


물론 나이를 먹어가면서, 운동을 시작하면서 중간중간 금주를 하기도 했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술을 마시곤 했다.


이번 금주의 원인은 역시 '건강'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축농증이 있었고, 꽤 심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수술을 1번 받았고,

지난 해 2번째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전 또 다시 축농증이 재발을 했다.


사실 다른 심각한 질병들에 비해서

축농증은 비교적 경미한 편이다.

하지만 삶의 질은 급격히 떨어진다.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니

업무를 볼 때 집중도 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회복을 해야했다.

병원에서 항생제 처방을 받았고,

만약 회복되지 않으면 재수술을 해야된단다.

3번째 수술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기에,

어떻게든 항생제로 회복을 해야했다.

항생제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금주를 시작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꽤 힘들었다.

퇴근 후 시원한 맥주를 들이킬 때의

그 느낌이 자꾸 생각났다.

술집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기분좋게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하지만 잠을 못자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였기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술을 마셔야 하는 모임에도 몇 번 참석했지만 아프다는 핑계로 금주를 유지했다.


한달이 지났다.

이제는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그리 크지 않다.

지난 한달간 느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 몇몇 음식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삼겹살'이라던가 '장어구이' 같은 음식들.

술과 같이 먹었을 때는 너무나 맛있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너무 기름지다는 느낌이다.

이런 식으로 기파하게 된 음식들이 좀 생겼다.

너무 비리거나, 너무 짜거나, 너무 느끼하거나 해서.


둘째는 내가 자주 보는 유튜브, 소설 등에

음주를 하는 씬들이 꽤 많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여행 유튜브 영상의 경우, 해당 유튜버가

매일 밤 현지 술집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있었고

부부의 일상을 다룬 유튜브 영상의 경우,

2명 중 1명이 매일매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최애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의 소설과 수필에도 술을 마시는 씬이 꽤 많이 있더라.

내가 술을 좋아해서 이런 작품들만 고르게 된 것인지

이러한 작품들로 인해 음주를 유지하게 된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는 저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해외여행'에 대한 흥미가 좀 떨어졌다. 해외여행을 가서 술 한 잔 못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김이 빠진다.

베트남 휴양지에서 칵테일 한 잔,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와인 한 잔,

도쿄의 이자카야에서 사케 한 잔.

이런 낭만이 없는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그런 느낌.


거의 30년 동안 술을 마시다가

고작 한달 금주를 한 것 뿐이다.

하지만 주변의 것들이, 나 자신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금주는 필요하다.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 지금부터 나는 완전히 금주를 하겠다'고

맹세할 자신은 없다.

이제 고작 한달이 지났을 뿐이고,

아직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기에.


다만 축농증이 재발하여 수술을 또 받는 건

정말 피하고 싶고

입맛이 까다로워 지는 바람에

다이어트도 약간 되는 것 같고

무엇보다 술을 마시는 동안

보지 못했던,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궁금하다. 그래서

일단은 금주를 조금 더 유지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책상 앞에 포스트 잇을 하나 붙여뒀다.


'고마해라. 많이 먹었다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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