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에어컨이 돌아가는 오후

9월의 어느 병원에서 일어난, 사소하지만 거대한 일에 관하여

1.

9월의 어느 화요일 오전,

나는 내과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11시 25분. 예약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한 셈이다.

나는 시간 약속을 지키는 편이다. 왠만하면.


진료환자의 순번을 알려주는 대기실 전광판

제일 위에 내 이름이 떠 있었다.

디지털 숫자들이 깜빡이며

순서를 알려주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대기실 중앙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병원 유튜브 채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박 원장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직 프로야구 선수였다. 전 롯데자이언츠, 현 불꽃야구.

박 원장이 그의 혈압을 측정하며 건강 관리에 대해 조언하고 있었다.

은퇴 후 체중 관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진료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박 원장의 목소리였다.

화면 속의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날카롭고 거친 목소리였다.

나는 사흘째 구내염 치료를 위해 이곳에 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고함에 가까운 소리였다.

전광판의 진료 순서가 20분째 바뀌지 않고 있었다.

내 뒤에 도착한 환자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안 부르지?" 누군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무슨 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점심시간도 아닌데 왜 이래요?"


환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간호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씩 환자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아해하다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2.

마침내 간호사가 내게도 다가왔다. 젊은 여자였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가에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박 원장님이 지금 급한 수술에 들어가셔서요.

다른 선생님께 진료를 받으시겠어요?"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박 원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진료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수술 중에 저렇게 소리를 지르시나요?"


간호사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췄다.


"면담 중이세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20분째 기다리고 있습니다."


"10분만 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오늘은 연차휴가이고, 오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나에게는 기다릴 시간이 충분했다.



3.

결국 나는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다. 젊은 남자 의사였다.

그는 내 차트를 보며 간단한 질문을 몇 가지 한 후,

어제와 같은 처방을 내렸다.


박 원장의 목소리는 그의 진료실에서도 들렸지만,

젊은 의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진료를 이어갔다.


수액실로 이동했을 때,

나는 며칠째 만나는 나이 든 간호사를 만났다.


그녀는 내 팔에 바늘을 꽂으며 한숨을 쉬었다.

구내염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한 지 사흘째였다.


"병원에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으신가 봐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같이 일하기 힘든 분이에요."


"의사들 사이에 문제가 있나요?"


"아뇨."


"그럼 직원 문제인가요?"


그녀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핀 후 속삭였다.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에어컨 때문이에요."


"네?"


"에어컨을 켰다고... 9월인데 에어컨을 켜놨다고 저러시는 거예요."


나는 수액실을 둘러보았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고 창문이 열려 있었다.

9월의 바람이 커튼을 살짝 흔들고 있었다.



4.

우리는 때로 아주 사소한 일에 거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꺼져야 할 에어컨이 켜져 있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 사람에게는 통제력을 잃어버린 증거였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한 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은 왜 리모컨을 항상 소파 오른쪽 팔걸이에만 놓는 거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리모컨은 오른쪽 팔걸이 위에 있어야 했다.

버튼이 위를 향하도록, 정확히 가운데에.

그것이 내 우주의 질서였다.


박 원장에게 에어컨은 무엇이었을까.

켜지지 말아야 할 때 켜져 있는 에어컨.

그것은 어쩌면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5.

저녁, 아내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나는 미지근한 죽을 천천히 떠먹고 있었고,

아내는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있었다.

구내염 때문에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자극적인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에어컨 때문에 한 시간이나 소리를 질렀다고?" 아내가 물었다.


"간호사가 그랬어."


"이상한 사람이네."


"어쩌면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에어컨을 가지고 있으니까."


"무슨 말이야?"


"통제할 수 없는 것들.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것들."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었다.


"당신의 에어컨은 뭐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에어컨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6.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거대한 병원 건물이 있었다.

모든 방에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박 원장이 복도를 뛰어다니며 에어컨을 끄려 했지만,

끄면 끌수록 더 많은 에어컨이 켜졌다.

그는 점점 작아졌고, 에어컨은 점점 커졌다.


나는 대기실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내 이름이 계속 깜빡이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새벽 3시였다.

아내는 곁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셨다.

냉장고가 낮은 소리로 윙윙거리고 있었다.

선반 위의 머그컵들이 크기 순서대로 정확히 일렬로 놓여 있었다.


7.

일주일 후, 나는 다시 그 내과에 갔다.

이번에는 정기 검진이었다.

박 원장이 직접 나를 진료했다.

그는 평온해 보였다.

에어컨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진료가 끝나고 나올 때, 수액실 앞을 지나갔다.

문이 열려 있었고, 안이 보였다.

에어컨이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9월의 끝자락이었지만, 여전히 더운 날이었다.


나이 든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혹은 미소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병원을 나왔다.


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이 걸어가고, 차들이 지나갔다.

어디선가 까치가 울었다.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지만, 나는 꺼내 보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조금 뒤에 확인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8.

그해 겨울, 우연히 신문에서 작은 기사를 보았다.

도심의 한 내과가 문을 닫았다는 내용이었다.

박 원장의 내과였다. 자세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그 기사를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에어컨 원장님 병원이네." 아내가 말했다.


"그래."


"안됐네."


"그런가."


우리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각자의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지 않았다. 혹은 꾸었지만 기억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양이가 창틀에 앉아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내리고, 식빵을 구웠다.

거실 소파 오른쪽 팔걸이에 리모컨이 정확히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겨울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여전히 겨울에도 에어컨을 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사람의 에어컨이라면,

그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이 인생이다.

혹은 인생처럼 보이는 무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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