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수필 속 그 이름을, 부산 센텀시티에서 마주하다
주말 오후, 센텀시티 신세계 백화점으로 향했다.
짝지 말로는 백화점이라고 해서 다 비싼 것만은 아니라는데,
확인 겸 해서 둘러볼 요량이었다.
계절도 바뀌고 슬슬 필요한 것들도 있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백화점 건물이 아니라 신세계몰 쪽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식당가를 지나가는데 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토끼정(停)'.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토끼정'이라는 이름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던가.
분명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에서였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그 안에 실린 '토끼정 주인'이라는 글.
손님이 열 명만 들어가면 꽉 차버리는 작은 식당.
주인 혼자 운영하는 곳.
매일 바뀌는 정식과 고로케 정식,
단 두 가지 메뉴만 있는 식당.
고로케 두 개가 예술작품처럼 담긴 접시.
보리밥과 바지락 된장국, 큰 그릇에 담긴 양배추 샐러드.
그 이름이 여기, 대한민국 부산의 백화점 식당가에 있다니.
반가움이 먼저였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렸던 책갈피를 우연히 발견한 것 같은 기분.
누군가 하루키의 그 수필을 읽고,
그 정취를 담고 싶어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여기 들어가 볼까?"
짝지가 물었다. 나는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토끼밥상' - 파스타와 카츠를 선택할 수 있는 세트 메뉴.
'크림카레우동' - 대표 메뉴라고 적혀 있었다.
'큐브 스테이크 카레',
'명란 크림 파스타',
'바질 새우 크림 파스타',
'트러플 머쉬룸 오일 파스타',
'철판 큐브 스테이크 정식'.
나는 천천히 메뉴판을 읽어 내려갔다.
수필 속의 토끼정은 딱 두 가지만 팔았다.
매일 바뀌는 정식 하나, 고로케 정식 하나. 그게 전부였다.
보리밥이 투박한 느낌의 큼지막한 밥 공기에 담겨 나오고,
젓가락은 약간 짙은 색의 날씬한 삼나무 젓가락이었고,
젓가락을 싸는 종이는 고동색이 섞인 연둣빛의 무늬 없는 일본 종이였다.
그런 소박함이었다. 정갈함이었다.
하지만 내 앞의 메뉴판에는
파스타가 있었고,
크림소스가 있었고,
트러플이 있었고,
큐브 스테이크가 있었다.
세련되고 현대적이고 다양한 메뉴들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맛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상상했던 토끼정이 아니었다.
"어때?"
짝지가 다시 물었다.
"응... 메뉴가 나한테는 좀..."
오십 대 남자가 크림카레우동이나
명란 크림 파스타를 먹으러 가기에는,
솔직히 끌리지 않았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뭔가 기대했던 느낌과 달랐다.
수필 속의 그 소박한 식당,
주인 혼자서 묵묵히 두 가지 정식만 내놓는 그런 곳을 상상했는데,
내 앞의 토끼정은 다양한 메뉴를 갖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그냥 다음에 하자."
우리는 한참을 그 앞에 서서 메뉴판만 구경했다.
집에 돌아와서 문득 궁금해졌다.
토끼정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브랜드 소개 페이지가 떴다.
그제야 알았다. 이곳이 전국적인 체인점이라는 것을.
서울역, 마곡, 강남, 여러 백화점에 입점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라는 것을.
몇 년 전부터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소설을 담다'라는 제목 아래 이런 문구가 보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속 '정(停)'있는 가게'
단편소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은 수필집이다.
'토끼정 주인'은 그 안에 실린 에세이다. 소설이 아니다.
작은 실수였지만, 뭔가 전체적인 아쉬움을 더하는 느낌이었다.
컴퓨터 화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토끼정이 있다는 것을.
하나는 하루키의 수필 속에 있는, 수수께끼 같은 주인이 혼자 운영하는 작은 식당.
딱 두 가지 정식만 내놓는, 카운터만 있는 그 소박한 곳.
다른 하나는 전국 여러 백화점에 입점한, 다양한 메뉴를 갖춘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
둘 다 토끼정이지만, 어쩐지 전혀 다른 곳 같았다.
센텀시티에서 느꼈던 반가움은 금방 식어버렸고,
그 자리에는 묘한 아쉬움만 남았다.
기대했던 만남이 어긋났을 때의 그 허전함 같은 것.
어쩌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키의 수필을 읽으며 느꼈던 그 정취는,
작은 것들에 대한 세심함에서 나왔으니까.
언젠가는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가 찾던 토끼정은, 전국 체인의 어느 지점에도 없다는 것.
그건 오직 하루키의 수필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
P.S.
하루키의 수필에서 토끼정 주인은 원래 야쿠자 출신이었다.
서른일곱, 여덟에 그 바닥에서 손을 씻고 식당을 시작했다고 했다.
목덜미에는 5센티미터쯤 되는 칼자국 같은 상처가 있었고,
옛 패거리들과 연락이 닿지 않도록 일부러 한적한 주택가를 골라
간판도 없이 조용히 장사를 했다.
그래서 더 수수께끼 같았고,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물론 한국의 토끼정 체인점 대표님이 그런 분일 리는 만무하다.
아마도 평범한 외식업 전문가일 것이다.
그렇다고 목덜미를 확인하러 식당에 갈 생각은 없다.
크림카레우동이 아무리 대표 메뉴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