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겨울이면 할머니와 엄마는 일 많은 손두부를 끓였다.
할머니도 비교적 젊었고 엄마도 아주 젊었을 적의 일이다.
지금은 마당 수돗가와 화단에 각각 버려진 무거워빠진 옛날 맷돌을 돌려 고부간에 두부를 끓였다.
물론 그렇게 일 많은 손두부는 어떻게 해도 맛있다.
순두부를 살살 떠먹어도 맛있고 간수 넣은 모두부도 맛있는데 겨울밤의 승자는 역시 거친 비지찌개였다.
두부 뜨고 남은 찌꺼기인 비지를 모아다가 뭉쳐 면보에 싸서 할매방 아랫목에 무거운 겨울 솜이불을 덮어놓고 며칠동안 비지를 띄웠다.
아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꿈꿈한 냄새가 실금실금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정말 지독해서 못 참겠다 싶을 즈음에 이불을 들추고 아주 잘 띄워진 비지를 먹을수가 있었다.
참 그렇게 냄새가 지독해도 그 방에서 밤새 단잠을 잤었다.
비지는 잘 뜰때도 있는데 실패할 때도 간혹 있었다.
그러면 비지가 비실비실 부스러지고 거슬리는 냄새가 났다.
잘 뜬 비지는 멸치물을 내고 김치를 썰어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춰 북덕북덕 끓이면 지금 시중에서 사먹는 비지와는 비교도 안되게 투박하고 쿰쿰하지만 비교도 할 수 없는 깊고 구수하고 뜨거운 맛이 났다.
고모네 새침한 사촌 언니들은 할머니의 비지를 좋아했다.
할아버지 제삿날이 되면 고모랑 사촌언니들이 와서 그 비지를 먹고 싸가고 그랬다.
제삿날은 설 일주일 전이었는데 사람이 북적여서 훈기가 가득 도는 좁은 부엌에서 할머니가 본인의 딸과 외손녀들을 먹이려고 끓여낸 비지찌개가 가장 맛있었다.
어찌나 맛있다 맛있다 할머니 비지가 제일 맛있다 하는지 참 얄미웠는데 비지찌개가 맛이 있긴 했다 ㅋ.
근래에 모 예능에서 차승원 배우가 두부 만드는걸 보다보니 비지찌개 생각이 간절했다.
생비지로 비지찌개를 끓여내는 장면에서 이보세요. 그 비지는 뜨신 아랫목에서 몇날을 띄우면 맛이 완전 제대로란 말이예요.생비지보다 몇배는 더 맛있어요!라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고향집에선 이제 두부를 끓이지 않는다.
입은 맛있었지만 엄마의 노동력 또한 아주 순도 백프로로 갈려있던 두부는 지친 엄마를 더 지치게 했다.
그땐 고모나 삼촌네에서 쌀이나 장을 비롯해 힘들게 만든 손두부도 할머니의 주도하에 조달해주던 시절이어서 엄마가 참 힘들었다. 할머니가 기력이 좀 빠지기 시작하고 부녀회에서 기계로 만드는 두부와 비지를 단체로 공수해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손두부 따위는 바로 손절했다.
할머니도 별 불만은 없이 엄마가 공수해온 부녀회 비지로 찌개를 끓였는데 아무래도 맛은 없었다.
할머니 돌아가신 후로 엄마한테 간혹 비지가 먹고 싶다는 말을 하면 이런저런 연결 끝에 손두부 시절 힘든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나 혼자 그냥 생각한다. 엄마는 비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거 같다. 그러고 보면 두부도 그다지 안 좋아하고...그 시절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아마도 질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비지찌개로 피와 살을 만든 나는 때때로 비지가 먹고 싶다. 쿰쿰하고 거칠던 그 옛날 비지 말이다.
지금은 덜한데 특히 겨울에 해넘이 쯤 되면 그렇게 비지찌개 생각이 간절하다. 뜨겁고 훈기나고 복작대고 어수선했던 옛날 고향집 생각이 나면서 다시는 먹을 수 없는 할머니가 띄우는 비지가 떠오른다.
그것은 그리움이라기보다는 빛이 바랜 사진속에 멈춰진 오랜 기억의 익숙함 같은 것이라 괜히 비지 먹고 싶은 핑계로 코끝이 찡해진다. 별로 돌아가고 싶은 나날들도 아닌데 뜨거운 비지찌개 생각에 마음이 아르르해진다고...
엄마가 들으면 아주 지랄한다고 할 것이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