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일이다.
유치원 방학 때 나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워낙 시골이었고 오빠나 언니도 그런 사교육을 받은 적은 없는데 엄마가 뭔가 그런 음악교육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던지 나는 피아노 학원엘 보내주었다.
다니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가라니까 그냥 다녔다.
동네 앞에서 언니 오빠들이랑 놀고만 싶었고 새로운 곳에 가는 게 무섭기도 했던 아주 어린애였는데 그 시절은 스파르타가 난무했던 시절이라 혼자 버스 타고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유치원 갈 때도 친구들하고 버스 타고 오고 갔으니까 당연했다.
학원에서도 어린 축에 끼다 보니 당시 국딩 언니들한테 치이는 건 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낯을 많이 타는 소심한 성격인 데다 너무 어렸던 탓에 특히나 살살 긁어대는 국딩 언니 한 명이 그렇게 무서웠다. 내 기억으론 매번 스트레스였는데 엄마한테 이야기는 안 했던 거 같다.
썩 즐겁지 않았던 음악적 라이프에 정점을 찍은 건 집에 가는 버스를 잘못 탄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촌 버스는 번호를 보고 타는 게 아니라 앞에 내거는 행선지를 잘 보고 타야 한다. 순환버스 비슷해서 타고 있으면 우리 집 방향으로 결국 가긴 하지만... 대여섯 살밖에 안된 내가 뭘 알겠는가 그냥 엄마가 가르쳐 준 버스 숫자만 보고 덥석 탔는데 하필 더 심심 촌골로 들어가는 버스였다. 가는 방향이 처음 몇백 미터는 같았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점점 달라지는 풍경에 쉬를 쌀 것처럼 숨 막히고 조그만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산골의 심부로 들어가기 직전에 버스에서 하차했다는 것이다.
내리자마자 울면서 버스가 왔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달렸는데 그러다 보니 유치원 친구 엄마도 만나고 해서 물어물어 어찌어찌 집으로 가는 방향을 잡아 뛰는 걸 멈추고 조금 쉬엄하며 걸을 수 있었다.
하차했던 동네에서 우리 동네까지 약 4킬로가 좀 넘는 거리였는데 나중에 중학생 때 그쪽 친구 집 가는 버스를 놓쳐서 그냥 걸어가 봤더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먼 길이었다.
그 길을 여섯 살 꼬마가 걸어왔으니 돌아온 그날은 정말 뻗어서 잠만 자고 그 참에 피아노 학원 손절! 시전 했다.
엄마도 이번만큼은 그 거리를 걸어서 집까지 찾아온 어린 막내가 상당히 안쓰러웠던지 더 이상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서 3학년이 될 때까진 아무런 학원도 다니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피아노 교습소 원장 선생은 매해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와서 나를 회유했다. 아마도 수업료를 내놓고 중간에 그만뒀던지라 킵해두기로 엄마랑 얘기가 됐던 모양이다.
결국은 3학년 때부터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떼잉...
뭐 음악적 감이 철벽인건 아니라서 심심찮게 상도 탔고 음악 시험은 늘 백점 먹었으니 나쁘진 않았다.
나중엔 지긋지긋해서 학원비를 땡쳐먹고 빠지기도 하다가 그만뒀다. 정말 그만둬서 너무 좋았다ㅎㅎ..
아빠가 어거지로 사둔 농가주식이 그럴 리 없는데 약간의 수익이 나면서 팔아먹을 때 운 좋게 피아노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피아노 아깝다고 맨날 치라고 볶아댔지만 그냥 재미가 없었다.
아주 무겁고 육중해서 옮기기도 힘든 그 피아노는 이제 고향집에서 조카들의 좋은 놀잇감이 되었다.
엄마는 아직도 핀잔을 주기도 하고 여전히 아쉬운지 이제 피아노 치는거 다 잊었냐고 물어올때도 있다.
나도 나이가 마흔이 다 됐어 엄마ㅎㅎㅎ...
동요 정도야 거뜬하지. 코드 짚는거 정도도... 재능이 없는건 아니었다니까? 피아노 계속 안친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음대 간다 그랬으면 미대는 그냥 장난이라고 살림 탈탈 털었을거라고 빽빽대본다.
우리 아들도 곧 그 피아노를 뚱땅거릴 수 있겠지.
다 그 메마른 집에 음악의 포문을 연 내 덕이야 촤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