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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해야겠어요.

by 따따따

대학교 1학년때 '빨래'를 과제로 받은 적이 있었다.

판화 시간이었는데 교수가 독일유학파 출신으로 상당히 깐깐했던데다 농담도 잘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에게 언제나 강력한 지적과 디스를 하곤 했다.

대개 하는 지적은 언제나 창의에 관한 것이었는데 너네는 획일적인 입시미술에 쩌들어 있어서 항상 틀에 박히고 고루한 결과물만을 주로 내놓는다 고정멘트였다.

자기가 공부하던 학교에선 서구애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신선한 작품들을 많이 내놓는지 너넨 모른다 좁은 우물에서 나와라 같은 노상 이런 지적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판화 시간엔 창의력에 노이로제 걸린 학생들의 이런저런 다양한 작들이 많이 나왔다. 그럼에도 쾌한 패스보단 꾸준한 지적질은 계속되었고 20년이 다 되었는데 전하려나.

자극을 주려는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하긴 뭐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시간만큼은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억지로라도 짜내게 됐으니까 효과는 있었던 셈이다.

여튼 빨래라는 주제를 내놓고도 창의력 일장연설 하며 우리를 달달 볶던 교수를 위해 나는 거미줄에 걸린 빨래를 판화로 팠었다. 아 식상하지만 나로선 많이 짜낸거다. 데생만 하다 온 촌것이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뭘 알았겠는가. 그에 대해 히 별다른 평은 못 받은거 같다.

그래도 B-에 해당하는 성적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전공수업에 비해 상당히 박한 점수였다. 하도 구박을 해서 C 나올거 같았는데 그래도 예상외의 감지덕지였다.

오늘 같이 쾌청하고 선선한 날에는 빨래건조기도 말고 빨래건조대도 말고 양쪽으로 줄을 묶은 빨랫줄에다 흰 빨래 널어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문득 그 판화 시간이 겹쳤다.

그래도 판화 자체는 매력 있는 작업이었지. 에칭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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