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또 외할머니

by 따따따

우리 외할머니는 돌아가신지 8년 되었다.

말년에 치매셨는데 요양원 가신지 얼마 안되어 가셨다.

엄마의 휴대폰에는 요양원 침대에 누워 큰딸인 엄마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는 외할머니의 영상이 딱 하나 남아있다.

엄마도 영상을 찍으면서 엄마 왜, 나 여기 있어 목소리도 크다 하며 웃기도 하는데 가끔 그 영상을 보면서 이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고 더 많이 찍어둘걸.. 할때가 있다.

그 세대의 사람들이 그렇듯 외할머니의 장남 사랑은 지극했다. 그런데도 치매로 드러누운 후에는 큰딸인 엄마 이름을 부를때가 잦았던거 같다.

생리도 없던 16세에 시집 와서 애 못 낳는단 타박을 받다 낳은게 20살의 첫 자녀이자 장녀인 엄마다.

딸이긴 하나 첫정이다 보니 부모와 친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첫 외손자인 오빠까지 온갖 귀염은 다 받았다.

5남매의 맏이인 엄마가 자존감 자존심이 모두 강한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시대만 환경만 조금만 더 타고 났다면 엄마는 아마 대장부가 되었을것이다.

여튼 외할머니는 흐린 정신으로도 큰 딸의 이름을 연신 부르며

ㅁㅁ아~~ㅁㅁ아~~

날 집에 좀 보내다오 응?

집에 가자. 하고 계셨다.

왜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인 외삼촌의 이름이 아니라 출가외인이던 큰 딸의 이름을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몹시 생소했다. 우리 친할머니는 자식의 이름보다는 큰애야 작은애야라고 하거나 얘야 라는 식으로 주로 불렀는데 외할머니는 꼭꼭 자녀들의 이름을 불렀다.

자녀의 수가 더 많아서일 수도 있지만.

노인이 그렇게 자녀의 이름을 꼭꼭 눌러담아 야무지게 부르는게 한편은 뭉클한 감이 있었다.

그 당시에 이미 환갑도 훌쩍 넘은 딸의 이름을 이렇게나 애타게 불러주는구나.

우리 엄마는 참 좋겠다.

동시에 참 서글프겠다.

그렇듯 이름을 불러주는 엄마가 이제 없어서.

그렇게 돌아가시고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뤄졌다.

외삼촌들이 현역이시라 객도 많았고 손자들도 이제 자리를 잡아 번듯하게 객을 맞으니 나는 출가외인 외손녀로 잠깐 조문만 다녀왔을 뿐이다.

그래도 외할머니는 상관 안했을것이다.

남의 집 구신인 외손녀야 뭐 그 정도로 충분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 전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 외손녀인 고종사촌 언니들은 발인까지 보고서야 돌아갔었다.

나와는 상황이 다르긴 하나 나는 꽤 무심하고 보수적이고 고루하고 편할대로 생각하는구나 싶긴했다.

친구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에 내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돌아가시고 난 뒤 뒤늦게 섭섭해하면 뭘하나.

이젠 다시 만날수도 없는 것을.

백중이라 그러는지 돌아가신 분들 생각이 난다.

외갓집에 놀러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서 서글퍼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