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증조할머니 치매 수발을 들었다. 혼자 한건 아니고 시어머니인 할머니랑 같이 했다.
두 손으로 얼굴에 똥을 정성들여 바르고 까맣게 있다가 자부와 손부를 한방에 완샷완킬 할때도 많았다는데 기본적으로 증조할머니는 결이 고운 사람이라 젊었던 엄마는 시할머니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는 며느리 입장였던지라 본인 시모가 얼굴에 똥을 바르고 자기를 기다렸으니 빡이 돈다.시상천지 이래가 우얄라꼬 요래 있노 이래가 우야노!이래가지고 누가 치우라꼬! 하며 증조할머니를 채근하면 그때만은 정신이 돌아와 추상같은 시어머니의 애티튜드를 갖추고
누가 치우긴! 니가 치우지!
했다고 한다.
엄마는 자기 시할머니 이야기를 할때는 즐거워보인다.
백내장으로 눈이 안보여 구분이 안되니 짝대기로 손부를 콕콕 찌르며 요게 요 알록달록한게 달구새낀(닭)가 뭐고 할때도 있고, 젊은 신혼부부였던 철없는 아빠가 눈 안보이는 자기 할머니에게 방구를 먹이거나 할머니 앞에서 엄마에게 짖궂은 장난을 걸며 투닥대면 이런 망할노무 자슥! 느그 모하노. 할미 눈 안보인다꼬 모하노 하이고 얄궂어라 얄궂데이~ 하며 혀를 꼴꼴 차기도 했단다.
엄마가 나를 낳고 증조할머니한테 안겨드리니 손으로 나를 더듬거리며 하이고 얄궂어라~~ 언제 낳았누 시상에 얄궂어라 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언니를 낳고 데려갔을땐 언니가 할머니 얼굴을 줘뜯는 바람에 이노무 가스나가. 아니 이노무 가스나 우째 지랄인고 하며 역정을 냈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취합해보면 증조할머니는 보드랍고 다정다감하면서 지금의 내 시어머니처럼 약간의 푼수미 백치미가 있었던거 같다.
바람 잘 날 없는 집에서 본인의 스트레스를 이야기 썰 푸는 걸로 풀었던 것 같고 혼잣말이 많았단다. 치매를 앓게 된 이후로도 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옛날 이야기를 하고 옛일을 되새겨 누군가와 즐겁게 대화하기도 했다. '논두렁 밑이 저승길이라'는 말을 잘했다고 했는데 그 말과는 달리 그 시대 사람 치고 80대까지 치매 말고는 큰 병환도 없이 장수했다.
그리고, 나에게까지 이어온 청도 운문사 청신암의 지극한 불자였다.주먹밥을 싸서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운문사는 지금도 가까운 데라고는 할 수 없는데, 나의 증조모는 지름길로 산을 넘고 남의 집에서 묵어가며 청신암을 다녔다. 증조모도 본인 시어머니인 고조모에게서 청신암을 이은것이라고 알고 있다. 지금도 청신암은 작은 암자지만 옛날엔 정말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엄마는 시집의 시금치도 싫도록 치를 떨지만 꽤 좋아했던 시할머니에 이어 본인도 청신암의 깊은 불자가 된 것만은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거 같다.
우리 할머니는 본인 시어머니를 경멸했다.그랬던거 같다.대처에서 첩과 살던 남편은 이유도 모르게 스스로 목숨을 해하고 앞으로 살아갈 일만 막막했을 현명치 못한 40대의 내 할머니는 '궁둥이 쳐들고 불상에 절만 박는' 증조모를 아주 경멸했다. 절만 하믄 뭐하노! 하며 시모를 멸시하면 저거저거 말하는 꼬라지 보라며 증조모가 또 혀를 꼴꼴 찼다고 한다. 결국은 할머니도 나이가 좀 더 든 뒤엔 청신암에 다녔지만 회의와 한탄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빨치산이 던지는 돌멩이가 집안으로 들이치는데 며느리와 손주들만 두고 안동포 수의를 껴입은채 와삭와삭 도망가던 시부모를 아무리 어리숙한 며느리라도 어찌 존경할 수가 있었겠는가. 증조모의 고운 이면엔 무서울 정도로 매몰찬 시어머니 또한 자리잡고 있었다.
증조할머니는 가실때는 짚불 꺼지듯 떠났다고 한다.
숨을 모으는게 고통스럽다거나 하는기색도 없이 그저 조용하게, 형수 손을 잡고 있던 사촌 시동생도 모르게 목숨불이 꺼졌다.
엄마는 증조할머니는 좋은데 갔을거라고 단 한번도 꿈 같은데 뵌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한번 본 적이 있는거 같다.
능소화가 핀 기다랗고 낮은 담장이 있는 집에 어떤 할머니가 무명옷을 입고 혼자 있는데 매우 익숙한 기분이었다.
꿈에 어쩌다 자기집 조상이 보이기라도 하면 재수 더럽게 옴 붙었다고 투덜대는 트라우마 덩어리 아버지도 그 얘길 하니 그건 니 증조할머니인가 보다며 피식 웃었다. 누구든 방구 먹이던 자기 할머니 떠올리면 웃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