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엔 절이다

by 따따따

고등학생때 일이다. 미대는 수능 치고 난 뒤가 본격적인 입시라서 아마도 입시중이었던거 같은데 이 입시하던 친구랑 둘이서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보내보자 이래가지고 영주 부석사에 가기로 했다. 스님하고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던 건 아니고 내가 그때 마침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었던지라, 의상대사와 선묘전설이 얽힌 부석사의 선묘각이 궁금해서 크리스마스 학원 쉬니까 부석사에 가자고 했던거 같다. 친구는 석사가 어딘지 모르고 그냥 단순히 크리스마스날 차를 탄다는 자체가 좋았었다고 한다.

기차 출발할때는 남쪽이니까 눈이 안왔는데 윗쪽으로 갈수록 점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영주역에 도착했을때는 푹푹 빠지는 대설이 내리고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 가는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사람들이 내릴때마다 눈에 미끄러졌다.부석사 가는 시외버스를 갈아탔는데 눈이 많이 오긴 했어도 부석사 입구까지 버스는 들어갔다.

지금도 부석사는 아름답지만 그때는 눈이 와서 더더욱 아름다웠다. 무량수전은 어린 우리가 보기에도 고색창연한 멋진 건축이었고 가운데가 부른 배흘림 기둥과 뜬돌인 거대한 부석은 엄청 신기했으며, 막상 선묘각은 그냥 작고 어두운 전각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부석사는 앉음새도 멋진 절이라 날씨만 좋으면 무량수전 앞마당이 안고 있는 소백산맥인지 태백산맥인지 하여간 오지고 지리는 풍광을 볼 수 있다. 그때는 눈이 와서 그 경치는 못봤지만 친구도 너무 멋진 곳이라고 좋아하며 스님한테 크리스마스 카드도 드리고 나왔다. 스님이 웃으며 받으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스님한테 크리스마스 카드 드리는건 10대 갬성이었기에 가능했던거 같다. 뭐 거기까지도 쿨하고 좋았다.


자 이제 집에 가야 되는데 문제가 생겼다.

폭설이 내려서 시내 나갈 버스가 안온다. 기차탈 시각은 다가오는데 버스는 올 생각을 안하고 추워 죽겠고 초조했다.조금만 더 나이를 먹었거나 옆에 놈이 남친이었다거나 썸남이면 차 끊겼다고 덩실덩실 좋아해도 되는데 옆에 놈(년)은 시골 병설유치원부터 여자고등학교 학원까지 같이 다니는 여자사람이다. 그런애하고 뭘 도모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춥고 배만 고팠다. 나는 지금도 정시에 집에 가는거 좋아한다. 후배가 언니 신데렐라예요? 그런다. 쫓아오는 왕자도 없는데 집에 가는 시간개념만 신데렐라다. 집안 분위기도 경직되었고 시골 살다보니 버스 배차가 시간이 정해져 있는 노선이라 배인 버릇 같은데, 여전히 기차시각이나 버스시각 같은데 엄청 예민해서 어지간하면 끊어놓은 대로 탄다.

요즘도 내 심리적 마지노선인 특정 시각이 지나면 초조해져 온다. 이것도 강박이겠지. 하여간 그땐 10대니까 더 그랬다.

친구는 느긋한 성격이라 마냥 그 상황이 즐거운데 나는 짜증 초조 강박 삼박자가 어우러져 그만 게이지가 뚝 떨어지고 이성의 끈도 같이 떨어서 계속 짜증이 났다.일단 어찌어찌 역에 도착하니 기차는 끊어졌고 버스만 있어서 버스 탔는데 우리 지역 도착하는데 원래 시간보다 거의 4~5시간이상 더 걸린거같다. 편협한 10대였던 나는 짜증으로 가득차서 계속 짜증내는데 친구는 옆에서 메모지 꺼내어 내 짜증내는 옆 모습을 그려서 보여줬다.


지금도 친구는 가끔 부석사 간 얘기하는데 내가 왜 짜증냈는지 그 포인트는 전혀 모르겠지만 자기한테는 정말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오래된 고향친구가 다 좋은건 아닌데 간혹 이래서 좋은 면이 있다. 아무리 똘짓을 해도 넌 태생부터 도라이구나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봐준다. 대신 평생 그 시선으로 나를 보는게 문제긴 한데... 그래 너 즐거웠음 됐다.돌이켜보면 그 친구가 느긋해서 정말 감사한 일이었.

나는 그날 이후로 크리스마스나 겨울에 절 가는걸 좋아하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크리스마스엔 절이 정말 조용하다. 지금은 아이가 있어 내키는대로 그러기는 힘들지만 겨울에 절에 간다고 생각만 하면 참 좋다. 나중에 영주가 고향인 대학동기가 초대해서 동기들이랑도 부석사 가고 남편하고도 겨울의 부석사에 가보긴 했는데 눈 오는 부석사를 다시 만나진 못했다. 추운건 갈때마다 똑같았다.그때 같이 갔던 친구는 종교도 없고 지극히 절 감성 제로인데도 19세의 부석사는 기억에 퍽 남았던지 결혼하고 자기 남편하고 다시 가본적이 있다고 했다. 앞마당 풍경이 레알로 오진다는 후기와 짜증내던 내 얼굴 생각난다고 이불 걷어차게 꼭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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