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열이 나면 꼭 숫자가 나오는 가위에 눌렸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숫자에 짓눌려 허덕이다가 깨면 열이 심하거나 토하거나 그랬다. 강인한 촌사람이니 약 없이도 대개는 하루이틀 안에 나았지만 겨울에는 약을 지어먹어야 했다. 일단 약을 먹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땀 빼는 게 국룰이었다. 지금 상식에선 맞지 않는 가정처방이지만 근래까지도 고향집에서는 그랬다. 괴로웠다. 열기로 괴로운데 무거운 이불까지 덮어써야 했으니. 고열도 내 면역체계로 어떻게든 이겨내던 시절이 있었다.
코로나에 또 걸렸다. 아프다.
몹시 친절했던 내과전문의는 대량의 약을 처방했다. 의사 선생님이 항생제와 스테로이드를 비롯 여러 가지 약이 쓰까져있으니(섞여있으니) 앵꼽거나(역하거나) 해도 참고 다 먹으란다. 이 정도로 사투리를 매우 진하게 쓰는 젊은 의사를 처음 봐서 진찰받는 와중에 신기했다. 하여간 쓰까진 약은 효과가 강력했고 주사까지 쓰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편은 우리 민족 고유의 방식을 존중하라며 이불 덮고 땀을 빼야지~ 하며 계속 이불 타령을 한다.
2년 전에 가족 모두가 코로나 걸렸을 때는 아이와 함께 아동병원에서 약을 받았었다. 어른 주사고 뭐고 애가 먼저니 대량의 약을 일단 처방받고 나왔다. 열에 시달리던 참에 대충 약을 털어 넣은 뒤 한숨 자니 열은 좀 내려 있었다. 그럭저럭 이삼일 후에 증세는 나아지면서 팽개쳐둔 약봉지를 정리했는데, 보니까 내가 먹은 약은 그냥 위장약 진해거담종류고 약봉지 아래쪽에 수납된 항생제 해열진통제 기타 등등 만병통치약들은 그대로 잔뜩 남아있었다. 이게 뭐야... 하며 허탈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해열진통제를 안 먹고도 먹었다 생각하고 고열도 이겨냈단 말이지. 원효대사가 이런 기분이셨겠군 생각했다. 그 약들을 안 먹어도 괜찮긴 했지만 후각이 사라졌고 시름시름 한 달 정도를 말라붙은 명절 전쪼가리처럼 볼품없이 앓았다. 이번에는 약을 확인 잘하고 먹는다. 해골물은 더 이상 사양이니까... 요샌 다들 마스크 안하니 별 수 없고 변이가 거듭되었다고는하나 코로나는 가급적 안 걸리시길 바란다. 아프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