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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an 20. 2020

무화과 이야기

리코타 치즈, 혹은 얼그레이와 함께하는 은은함.

꽃이 과육 안쪽으로 피어난다는 신기한 형태에 대해서만 들어 보았지 나에게 무화과는 그리 친숙한 과일이 아니었다. 생 무화과는 성인이 되고도 한참 동안 먹어본 적도, 하물며 본 적도 없었고, 그나마 건무화과만 호두 무화과 빵을 통해서 처음 먹어보게 되었다. 건무화과의 쫄깃한 과육, 오독오독한 씨앗, 그리고 호두의 쌉싸름함과 잘 어우러지는 깊은 달콤함이 매력적이어서, 한 때 베이킹에 빠져 있을 때 건살구나 건베리 등 다른 말린 과일들과 함께 호두 무화과 빵을 종종 구워 먹었다. 


그러다가 어떤 하루, 늘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트레이더조에 들렀더니 생무화과를 잔뜩 팔고 있었다. 왜 지난 몇 년간 보지도 못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화과 철인 모양이었다. 어릴 적 생무화과를 종종 먹었던 아내와, 생무화과가 궁금한 나의 이해가 일치하여 한 팩 구매하기로 하였다. 말이 한 팩이지, 거의 1.5kg 정도 되는 양이었다.


사실은 무화과가 먼저인지, 리코타 치즈가 먼저인지 모르겠다. 생무화과를 보고 잘 어울리는 재료로 리코타 치즈가 생각이 났던 것인지도 모르겠고, 집에서 만들 수 있다는 리코타 치즈를 만들어보고자 하여 그에 잘 어울리는 재료로 생무화과가 생각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생무화과와 리코타 치즈라는 조합은 정해져, 아내가 리코타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리코타 치즈를 집에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보니 너무나 신기했다. 뽀얗고 매끈하면서 꾸덕한 질감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맛은 아주 크리미하고, 부드럽고, 아주 살짝 상큼한 맛이 났다.

아내는 그렇게 만든 리코타 치즈와 사온 생무화과를 메인으로 샐러드를 준비하였다. 거기에 호두를 얹어 보드라운 샐러드 채소를 베이스로 삼고, 고소한 통곡물 토스트를 살짝 구워 아아와 함께 성대하고 차분한 브런치를 준비했다.

소소하고 러스틱하고 따뜻한 분위기. 그 맛도 그러하였다. 은은한 무화과 과육의 단맛, 껍질 부분의 약간의 쌉쌀함, 그리고 아주 크리미한 식감. 그 미각을 한껏 북돋아주는 보드라운 리코타 치즈의 맛. 그를 보완해주는 샐러드 채소의 아삭한 식감과 담백한 풀의 맛, 바삭하고 고소한 곡물 빵의 맛. 모든 것을 씻어내어 주는 아아.


무화과의 은은함은 계속 다른 은은함을 불러온다. 리코타 치즈가 그러하였듯, 이 다음 파트너는 얼그레이였다. 향긋한 홍차와 버가못의 향이 무화과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아내는 얼그레이를 냉침하여 얼린 우유 얼음을 으깨고, 밀크티 버블을 올리고, 무화과를 곁들여 '무화과 얼그레이 빙수'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렇게 평하였다. '신라 호텔에서 57,000원 주고 사 먹을 수 있는 맛'이라고. 물론 못 사먹는다. 그러니 만들었겠지.


남은 리코타 치즈는 간단하게 토스트에 발라 낮 간식으로 무화과를 곁들여 먹었다. 그 조합의 감동은 여전했다.


그리고 아내가 무화과로 만들어내려던 대망의 작품, 얼그레이 무화과 케이크. 요즘 말로 하면 정말, 무화과와 얼그레이 쳐돌이, 쳐순이들이다. 베이킹 전문가 친구의 자문과 도움을 받아서 시폰 빵 레이어, 그리고 휘핑한 크림에도 얼그레이를 잘 섞어 넣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위를 장식한 무화과.

구름이.

얼그레이 시폰에 배어 있는 깊은 홍차 맛과 상큼한 버가못 향. 

무화과의 크리미한 맛, 은은한 향.

그를 이어주는 얼그레이 크림.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다.


이 모든 무화과 파티 이후에도 남은 무화과는 잘 말려서 냉동실에 잘 얼어 있다. 조만간 또 꺼내서 빵을 구워야지. 온 집이 밀, 호두, 무화과의 향, 그리고 빵의 온기로 감싸 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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