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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May 31. 2020

집 이야기 4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여유롭고 평화로운 늦은 오후, 베란다에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은 마루 한켠까지 적시며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구름이는 손, 발을 배 아래에 꽁꽁 숨겨놓고 그릉그릉, 그 햇살의 온기로 식빵을 굽는다.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고, 흔들리는 초록 잎들을 눈으로 좇으며, 실려오는 냄새에 콧구멍을 씰룩인다. 한참 늘어져 있다가도 이 아파트 어딘가에 거주하는 새들 몇 마리가 잠깐 베란다 울타리에 앉으려면 언제던 뛰쳐나갈 것 같이 몸을 딴딴하게 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그들을 지켜본다. 해가 지고 나서도 구름이는 그 창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나에겐 어둠의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는데, 구름이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이 커다란 창은 아마 구름이의 TV인 것 같다.

 한편 보리는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랑 친하다. 정말 기가 막히게도 '아이들'을 잘 파악해서, 그들이 베란다 바깥에서 쫑알거리고 있으면 창 앞에 앉아 본인도 뭐라고 한참을 말한다. 지나가던 새들을 볼 때 채터링하는 것과는 다르게 정말 대화를 하는 것 같다. 성인에게도 가끔 말을 걸곤 하지만, 아이들한테 유난히 그러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다. 이 아이들은 커다란 보리를 '마마캣'이라고 부른다. 고정관념적인 성역할을 뛰어넘어 우리집 모든 고양이들을 돌봐주고, 고양이로서의 롤모델이 되어주는 이 시대의 참된 생물학적 남성 고양이다. 역시 내 새끼는 천재다. 

보리, 뭉이, 몽이, 복이, 북이, 구름이 | 공이
누가, 누구, 니니 | 범이, 봄이, 빰이

 이 장소는 보리, 구름이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고양이들이 좋아한다. 우리 집을 거쳐간 거의 모든 임보 고양이들이 햇빛이 들 무렵이면 꼭 창문 옆에 누워서 낮잠을 자거나, 장난을 치거나, 가만히 앉아 밖을 쳐다보곤 했다. '누가, 누구, 니니'같이 시커먼 녀석들은 이러다 자연발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늘 장난스런 걱정을 했는데, 그렇게 햇빛에 구워진 녀석들의 북실북실한 털에 코를 쿡, 가져다 대면 보송보송하고 따스한 햇빛의 냄새가 가득했다. 그들은 어이없다는 듯, 성가시다는 듯 쳐다보면서 내가 닿았던 자리를 열심히 그루밍한다. 

 베란다, 아내의 정원에서 오늘도 많은 초록들이 한껏 햇빛에 신나하고 있다. 며칠 고생하던 로즈마리는 비료 덕인지 다시 조금 기운을 차렸고, 타임과 오레가노는 물이 부족했는지 한껏 축 쳐져서 물을 흠뻑 주곤 부디 그들이 회복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아무리 과학, 의학, 식물학 등 세상이 발전해도 결국 생명을 유지하는 데엔 그 생명 자체의 회복력이 가장 중요하다. 아내도 나도, 컨디션이 안 좋은지 집안일을 하다 손가락 몇 군데를 베였다. '자고 일어나면 많이 붙어 있겠지,' '내일은 컨디션이 조금 더 낫겠지,' 하고 바란다. 오늘도 내 몸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아내가 묻어놓은 파에 보송보송하게 꽃이 폈다가 어느덧 거의 다 지고, 씨방에 까만 파 씨가 예쁘게도 영글었다. 힘을 다한 파는 그 날 저녁, 닭 한마리에 넣어 소중하게 먹었다. 씨앗들을 이 다음 세대의 파가 될 수 있도록 키워보겠으나 역시나 이 또한 이 녀석들의 생명력에 달려 있다.

 하늘하늘한 작은 관상용 올리브나무 '올리볼리'에 꽃이 피었다. 처음 보는 올리브 꽃은 너무나 신기하고, 예뻤다. 아주 작은 꽃잎에 노란 수술, 짧게 피어 있던 동안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꽃이 진 자리에 무엇이 남을지 궁금하다. 오늘도 아내의 정원은 태어나고, 지고, 피고, 죽고, 회복하고, 그렇게 자란다.

 구름이의 TV 앞에는 나의 던전이 있다. 내가 어질러 놓아도 아내가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한 곳이다. 재택 근무로 인해 주 업무 공간이 되고, 나도 집안일을 도울 수 있게 된 뒤로는 조금 더 잘 정돈하면서 지낼 수 있게 되었으나, 엄청나게 카오틱한 시절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아내가 나보다 정돈에 있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안다. 아내는 내가 아주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일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타협점을 찾고, 앞으로 일생을 공존해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대화를 한다.

 정말로 집중하고 컴퓨터에 부하가 많이 걸리는 일을 해야 할 때는 나의 던전에서 업무를 보지만, 그래도 나, 아내, 그리고 고양이들이 같이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공간은 아마도 이 식탁인 것 같다. 식탁 내 자리 뒤로 아내가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붙여둔 수많은 사진들, 하나, 하나 볼 때마다 우리가 가진 추억들을 되새기며 그 때의 마음, 경험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함께한 지 어느덧 10년차, 우리는 같이 또는 따로 아주 많은 경험을 했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 사이 우리의 추억이 깃든 많은 레스토랑들이 문을 닫았다. 처음으로 같이 파스타를 먹은 <소렌토>라던지, 파스타로 유명했던 <JK 키친>이라던지, 식사 하기 전 간간히 피아노를 칠 수 있던 파스타집 <바쥬>라던지, 마찬가지로 피아노를 칠 수 있었던 환경이었다가 완전히 모던한 스타일로 리모델링된 찻집 <티포투>라던지, 어느날 투표를 하고 몽골리안 비프를 먹으러 간 <라이스 스토리>라던지. 방금 찾아보니 내가 그에게 프로포즈한 헤이리의 <루미 케익>은 아직 닫지 않았다. 왠지 다행이다.

 아내에게 미국이 '내 나라'인 부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순전 내가 여기에 터전을 자리잡고자 했으니 같이 온 것 뿐이다. 연애 초반엔 절대로 미국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는 '내 나라', 한국을 떠나서 나와 함께 해 주기로 했다. 집 안이라는 환경에서 나는 그의 방식에 맞추게 된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그리는 삶의 모습 때문에 그의 터전 자체를 바꿔 버리게 되었다. 아주 어려운 일일텐데, 그는 여전히 나와 함께 해 주고 있다. 그 나름대로 서핑도 하고, 같이 캠핑도 가고, 고양이도 돌보고, 파머스 마켓에 가서 수박 주스도 시음하고, 한 시간씩 산책을 하고, 너서리에 가 수국도 구경하고, 그 나름대로 즐겁게 지내는 모습에 나는 그저 고맙기만 하다.

 어제 <삼시세끼>를 시청하고 있으려니 차승원 배우가 두부를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그 섬에서 처음으로 두부를 만드는 장면에 출연자 모두가 놀라고 설레는 모습에 나의 아내가 두부를 처음으로 만들었을 때의 생각이 났다. 그 때 나 또한 너무나 신기하고, 너무나 맛있었다. 아내도 이젠 만들다보니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진짜 신기했다고 했다. '한국에 살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야,' 라고 그가 말하면서 두부, 청국장, 콩국수, 순대, 족발, 막창, 만두, 곱창, 김치(배추, 깍두기, 파, 오이소박이, 부추, 무생채, 갓, 열무, 알타리 ...), 찜닭, 고등어 조림, 인절미, 꽈배기, 쭈꾸미, 치킨, 지코바 등등을 요리해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미국에 지내며 이런 것을 먹게 되어서 너무나 좋지만 아내는 이럴 일 없이 한국에서 지내는 것이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러나 아내는 그건 모르겠고, 이 다음 넓은 집으로 이사할 때엔 꼭 김치냉장고나 커다란 냉동고를 사야겠다는 포부를 밝히곤 한다.

 우리의 식탁 옆에도 동쪽을 바라보는 제법 큰 창이 있어, 아침에 쏟아지는 햇빛이 너무나 뜨겁고 예쁘다. 고양이들은 아침 시간, 이 햇빛 안에 누워있곤 한다. 부드러운 자연광을 제공해주는 이 창 덕에 나는 아내가 하는 요리들을 가능한 예쁘게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이 상 위에서 아내는 라탄 공예도 하고, 재봉도 하며, 퀼트도 하고, 그림도 그린다. 가끔은 순대나 만두도 빚어내고, 아가 고양이의 맘마를 먹이고, 배변 유도도 한다. 이렇게 바쁘게 무언가 하고 있으면 꼭 고양이들은 우리가 앉아 있는 식탁에 와 얼쩡거리며 칭얼거린다. 그러면 아무리 바빠도 그들을 무릎에 앉히거나, 식탁 위에서 한참 쓰다듬어주고 놀아준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계속하여 우리의 집을 채운다. 나에게 인상깊었던 맥주 라벨을 떼어 벽에 붙이고, 라탄으로 예쁜 전등 갓을 만들고, 가끔씩 아내가 구해 오는 책으로 주워 온 책장을 채워 나간다. 

 '우리가 이사가게 되면 뭘 가져가지?'

 아내가 물었다.

 '글쎄, 아마 일단 우리가 주워 온 건 대부분 버리거나 팔테고, 돈 주고 산 것만 고민해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이 마루라는 생활 공간, 우리가 우리 돈을 주고 산 것은 소파 뿐이다. 그마저도 최근에 큰 맘 먹고 산 것이지, 그 전에 쓰던 것은 친구에게 20달러에 얻어온 것이었다. 내 던전의 책상도, 책장도, 모든 의자들도, 거대하고 무거운 식탁도, 흔들의자도, 전자렌지도, 전기 포트도, 모두 주워 온 것이었다. 아내의 정원에 있는 많은 수납 선반들, 화분들도 어디서 주워 왔다.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고맙게도 이 동네 사람들은 뭘 그렇게 잘도 버린다. 몇 주전 급히 집에 있던 프린터를 쓰려고 해 보니 고장이 나서 가져다 버려야만 했다. 그런데 며칠 뒤, 아파트 쓰레기통 옆에 상자채로 프린터가 버려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가져와 연결을 해 보니 너무나 멀쩡하게 작동하는 데다 잉크도 반 쯤 차 있었다. 아내와 함께 양 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요가를 마친 아내가 매트에 누워 있으려니 또 고양이들이 몰려든다.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낮잠을 잔다. 이 다음엔 어디로 가게 될까. 언젠가 한국에 다시 가게 될까. 지금 이 지역은 혼돈이 가득하다. COVID-19 감염, 사망 케이스는 여전히 늘고만 있다. 백인 경찰의 흑인 사살 사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고, 중국과 미국 간엔 냉전이 고조되고, 미국은 자국민에게 신나게 돈을 뿌려 댄다. 아마 이 곳도 '내 나라'는 아닐 것이다. 다만 이곳엔 나와 아내, 보리, 구름, 그리고 몽, 뭉, 복, 북이가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다. 지금 이 곳 만큼은 즐거운 우리의 집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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