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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May 30. 2020

집 이야기 3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인터폰 벨이나 학교 종 소리로, 아니면 트럭이 후진할 때 자주 들리던 단조로운 8화음의 띵똥거림 덕에 아주 익숙해진 멜로디에 반해, 되돌아보니 '즐거운 곳에서 나를...', 혹은, '내 집뿐이리' 말고는 이 노래의 가사를 떠올릴 수 없었다. 한동안 피아노를 쳤어서 그런지, 가사가 있는 노래를 듣더라도 항상 멜로디만 기억하고 가사는 정말 못 듣는 나로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찾아보게 된 번안된 이 노래의 가사 세 번째 구는 이러했다.


 '...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


 성인이 되어 미국에 산지 딱 10년이 되었다. 어릴 때 지낸 것까지 합치면 내 삶의 딱 반을 미국에서, 그리고 나머지 반을 한국에서 살았다. 미국이 '내 나라'인가 하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이 '내 나라'인가 하면, 마찬가지로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미국에서의 삶을 그릴지, 한국에서의 삶을 그릴지 결정해야 했던 시점, 너무나 익숙하지만 나를 끌어내리던 환경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이에 대해 몇 문단을 쓰고 보니 이게 별 일인가 싶었다. 차라리 굉장히 드라마틱하면 자랑이라도 하지, 너무나 현실적이고, 평범하고, 재미없는 굴레였다. 그러나 이대로는 평생 은근한 질척함과 끈적임에 내 일상이 삼켜질 것은 분명했다.

 학창 시절, '너는 안 된다,' 라는 얘기를 끝도 없이 들었다. 잘난 '전교 1등'을 해도, 뭔 올림피아드에서 상을 타도, '그것 밖에 못하냐', 'S대는 너에겐 턱도 없다'와 같은 부정과 한편 부모의 '너는 어쨌던 S대는 가야 한다,' 라는 은근한 기대에 나는 나의 될 수 없음과 되어야함 모두와 싸워야 했다. S대는 나의 부모의 큰 컴플렉스였다. 결국 이루어내니, 왜 다른 더 좋은 과를 못 갔냐고 하였다. 미적분 첫 수업을 들었을 때, 과학고 출신이 80%였던 동기들에게 교수는 '이거 다 알지?' 하며 다섯 챕터를 뛰어넘었다. 조교에게 나는 문과 학교의 출신이라 하나도 모른다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너 같은 놈이 이 대학을 깎아 먹는다고 하였다. 나는 다 때려칠 각오를 하고, 강의실 대신 학교 옆 산의 계곡에 앉아 여자 친구가 준비해 준 도시락을 먹으며 둘의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1.4란 화려한 학점으로 학교를 때려 치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미국에 와서 다시 처음으로 미적분 수업을 다시 들었을 때, 정말 차근차근, 고작 12주 수업에서 첫 4주를 누구나 알 것 같은 기초를 다지는 데 굉장히 정성을 들이는 것이 좋았다. 거기에서 시작하여 12주차 즈음엔 굉장히 고차원적인 내용까지 다루는 것이 놀라웠다. 마지막 주, 조교에게 질문을 하러 갔더니, 이건 자기도 잘 모르겠다면서 이 다음, 심화 강의의 교수에게 가서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시험'을 위한 학습이 아닌, 학문의 이해를 위해 머리를 싸매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

 학부 시절, 여름은 학기가 아니니 장학금이 지급되지 않아 한국에 돌아가야만 했다. 부모의 집에 가는 것은 늘 늪 같았다. '이번에도 4.0이지?' 라고 부모가, 조부모가 묻는 것이 피곤했다. 내가 가진 모든 능력과 노력을 쏟아부어 힘들게 공부했던 학기의 기말고사 마지막 날, 꼬박 몇 날 밤을 새었으나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모든 과목 'A'를 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여자 친구에게 영상 통화를 하며 펑펑 울었다. 그는 나를 위해 같이 울어 주었다. 아빠는 '실망이네,' 라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중학교때 '전교 1등이 2등이 되고 [...] 128등이 되고, 그렇게 망하는 기다'라고 했듯 여전히 '4.0이 [...] 그렇게 망하는 기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집을 떠나 처음으로 생활하게 된 기숙사에서 나는 빨래도 할 줄 몰랐다. 4L짜리 빨래 세제를 통째로 넣고 세탁기에 돌렸더니 빨래가 그렇게 끈적끈적해질 수 없었다. 여덟 명이서 쓰는 공용 주방에서 뭣도 모르고 요리를 하다가 연기로 인해 뺵빽 울어대기 시작한 화재 경보기의 소리에 놀라 던져버린 후라이팬에 타버린 바닥 카페트를 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맘대로 실수하고, 내 맘대로 고생하고, 내 맘대로 그 다음번에는 개선하는 과정이 얼마나 자유롭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미국에서의 삶은 그 나름대로 힘든 점이 많다. 아마 그것이 다 응집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이 COVID-19 사태일 것이다. 그럼에도 학부 시절, 아무것도 없던 시절, 여름 방학이 끝나고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 아닌 돌아오는 길, 공항 셔틀버스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편안했다. '아, 집이구나.'

 대학원 입학식날 아빠, 엄마는 그들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 진학함에 뿌듯해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처음으로 미국에 와선, 왜 내가 '스탠포드'에 갈 수 없었냐고, '그럴거면 차라리 S대로 돌아가지,' 라고 말했다. 도망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70센트짜리 요거트를 먹다가 15달러짜리 라멘을 얻어 먹으니 맛있었다. 그러나 70센트 요거트를 먹어도 좋으니 일단 어서 경제적으로라도 독립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직도 나의 아빠, 엄마를 괴롭힌다. 나는 그것에서 도망친 비겁한 사람이다. 나이가 조금씩 들 수록, 왜 그들이 그러하였는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이 진득한 악순환을 끊어내고 싶다. 그리운 부분이 아주, 너무나 많지만, 나에게 아직 한국은 '내 기쁨 길이 쉴', '내 나라'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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