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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un 06. 2020

힘든 순간의 이야기

그래도 열심히 먹고, 열심히 하루를 보낸다.

 아내가 방에서 나간다. 시간을 보니 새벽 세 시 반. '더 자요, '라고 말하면서.

 걱정에 뒤척이다 간신히 잠에 든 참이었다. 그를 따라 나가니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보리를 쓰다듬으며 서럽게 울고 있다. 보리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내가 정말로 서럽게도 운다. 등을 쓰다듬어 주는 동안에도 그의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계속 흘러나온다. 슬픈 꿈을 꾼 모양이다.

 그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서럽다. 나는 왜 또 이렇게 고민과 걱정이 많은지, 거지 같은 코로나 사태와 폭동 상황은 끝이 나지를 않는지. 나에게 빚은 왜 이렇게도 많은지, 이렇게 빚을 지면서 하게 된, 해야만 하게 된 이 공부가 왜 이리도 하기 싫은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왜 우리는 아파가는지. 왜 이렇게 공허한지. 아, 이렇게 공허하기에 이렇게 삶에 많은 것을 채우려고 노력을 하는 것일까. 빈 것을 채우기 위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맛있는 음식에 신나 하고, 고양이들을 데리고 있고, 풀들을 들이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것일까. 내가 괜히 아내를 이 멀고 먼, 외로운 타지, 그리고 외로운 나의 삶으로 끌어들인 것일까. 언제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이 삶을, 나도, 아내도, 보리도, 구름이도 어떻게 헤쳐가야 할까. 왜 살고 있는 것일까.

 보리는 여전히 말똥말똥 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괴롭혔으면 도망갈 법도 한데, 가만히 앉아서 나와 아내를 번갈아가며 본다. 아내에게 물을 떠다 주고, 클리넥스 몇 장을 뽑아다 준다.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계속 등을 쓰다듬어 준다. 나까지 울 수는 없다. 옆에 앉은 아내가 너무나 가엾다. 그러나 손바닥에 느껴지는 그의 등은 따뜻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의 냄새가 포근하다. 삶은 외로운 법이라고 하나, 유난스러운 아싸라 주변에 사람이 없는 나에게 이 사람이 내 옆에 있음에 너무나 고맙다. 지금 내 삶엔, 적어도 나 혼자는 아니다. 그와 내가 있다. 그리고 보리, 구름, 곧 떠날 테지만 지금은 몽이, 뭉이, 복이, 북이가 우리와 함께 있다.

 눈물을 훔치는 아내와, 감정의 깊은 골로 빠져들고 있던 나의 무릎 위로 따뜻한 아가 고양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촐랑대며 뛰어와 그릉그릉 거린다. 그들의 따뜻한 심장소리가 허벅지에 느껴진다. 사실 그들은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그맣고 따스한 이 녀석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아내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도 웃는다. 왜 사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치곤 생각해보니 나도 이 녀석들이 잘 살아서 어엿한 고양이가 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맘마와 약을 먹었다. 그 결과로 이렇게 천방지축인, 세상 모든 것이 재미있는, 어리나 어엿한 고양이로 자라났다. 뿌듯하게도, 섭섭하게도 이들은 곧 떠나갈 것이다.

 '자러 가자, ' 아내가 말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늘 그렇듯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커피를 내렸다. 그릇 정리를 하고, 여섯 고양이들 맘마를 주고, 그들의 똥을 치우고, 쓰레기를 버리고, 풀들에 물을 주었다. 날이 따뜻해서 민소매를 꺼내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그 하기 싫은 일을 시작했다. 그래, 다시 힘 내보자. 걱정하던 일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생각해 보자. 얼마 있다 퉁퉁 눈이 부은 아내가 마루로 나왔다. 조용하지만 쳐지지는 않는 하루였다. 아내는 말했다. 내가 옆에 있어서, 고양이들이 뛰어다녀서, 외롭지는 않았다고. 같은 마음이었다.

 저녁 시간, 있는 것으로 상을 차렸다고 했다. 매콤한 돼지 두루치기, 깻잎지, 열무김치, 스팸 구이, 브로콜리 무침, 계란찜,  왠지 계속 그리운 느낌이 드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이거, 급식 같지 않아?'

 '어? 그러네!'

 잠깐 신나게 웃었다.

 나이가 들면 회상을 먹고 산다고 하는데, 이미 우리도 그런 것 같다. 언니네 이발관, 핑클, 동물원,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의 어린 기억들을 얘기하곤 한다. 급식 우유로 먹을 때 초콜릿 우유가 나오면 얼마나 신이 나던지. 제육볶음, 마늘종 볶음, 임연수 구이에 대한 기억들. 그놈의 미더덕 된장국은 왜 그렇게도 많이 먹였는지. 수요일에 먹던 하이라이스는 어찌나 맛있는지. 왜 그렇게 흑미밥의 진한 맛이 싫던지. 엄마가 해주던 계란찜은 왜 얼굴 찡그리며 물 마실 정도로 짜던지. 왜 혼자 급식을 먹고 있으려면 정신병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가던지.

 어릴 때는 죽어도 싫던 냉국의 오이의 향이 점점 익숙해지고 가끔은 향긋하게 느껴진다. 아내의 계란찜은 진한 다시마 육수로 아주 섬세하게 쪄져서, 편안하게 감기는 감칠맛과 폭신하고 매끄러운 계란의 질감, 그리고 향긋한 야채의 향이 아주 돋보였다. 매콤한 두루치기야, 어찌 안 좋아하고 배길 수 있을까. 열무김치의 산뜻한 매콤함은 계속 감탄을 내뱉게 한다.

 다음 날 저녁은 냉동실/냉장고 털이, 매콤한 양념을 더해 토치로 지져낸 불족발, 얼려둔 고로케, 만들어둔 손두부, 어제 먹고 남은 야채 볶음. 족발과 고로케와 손두부가 남아 있는 우리 집 냉장고에 감사하며 밥을 먹었다. 족발에 입혀진 불향, 그 쫄깃하고 탱글한 식감, 보드랍고 바삭하면서 중간중간 씹히는 할라페뇨에 매콤한 고로케, 고소하기 그지없는 구워낸 두부, 거기에 더해지는 아삭한 야채들.

 이 저녁 상의 메인은 족발도, 고로케도 아니고, 두부 비빔밥이라고 했다. 뭔가 싶었는데, 흑미, 현미밥에 부친 손두부를 잘 으깨 담고, 콩나물과 야채볶음을 얹은 후, 간장 양념을 더해 열무김치로 마무리하니, 왜 비빔밥이 한국인의 음식인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고로케와 족발은 사이드가 되었다. 물론 너무나 맛있었다.

 공허해서 맛있게 밥을 먹는가, 그런 부분도 있을 수도 있겠으나, 아마 아내와 나는 그냥 맛있는 밥을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부분이 훨씬 더 큰 것 같다. 아내가 이건 꼭 먹어 보아야 한다며 된장 맛 가득한 깻잎지에 두부와 콩나물, 야채, 밥을 싼 후, 마늘과 간장을 얹어서 내 입에 넣어 준다. 와, 저 세상의, 아니, 이 세상의 맛이다. 이 세상엔 내 아내밖에 없다.


 다음 날, 하기 싫은 미팅을 일찍 끝내곤 코리아타운으로 장을 보러 갔다. 우울한 줄만 알았던 세상, 셔터가 내려져 있던 많은 상점들이 열려 있었고, 마스크를 한 채지만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이고 생기가 넘쳤다. 평소라면 부담스럽게 느꼈을 'XX 한 번 보고 가세요!' 하는 판촉 담당 직원분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너무나 반가웠다. 잊혀가던 일상의 모습이 돌아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아내는 평소보다 신이 난 모습으로 장바구니에 재료를 담았다. 그의 기운이 높은 모습에 마음이 짠하고 기뻤다.

 열심히도 장을 봤다. 새로 크게 개장한 한인 마트에 들러서 구경도 열심히 하고, 신도 내고, 커다란 수박 한 통을 사 왔다. 아주 저렴한 막갈비 한 덩이, 평소와는 다르게 그냥 갈비찜용 고기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다른 한인 마트의 수산물 담당 아저씨의 도움으로 아주 싸게, 좋은 새우를 많이 구했 왔다. 늘 그렇듯, 그 이외에도 수많은 야채들과 과일들을 담아 왔다. 다 해서 그래 봤자 $50, 마음이 풍족하고, 매일이 오늘만 같아라.

 사온 막갈비로 아내가 쉴 새 없이 준비를 하여 매운 갈비찜을 저녁으로 차렸다. 양념은 땀나게 매우면서 기분 좋게 달달했고, 당면과 떡 사리, 수많은 야채들의 향연이 펼쳐졌으며, 그리고 곁들여진 날치알, 김 주먹밥은 고소하고 감칠맛이 가득했다. 시원한 콩나물국, 그리고 곁들인 소주 한 잔. 세상 별 것 있나, 역시 맛있는 것 먹고 사랑하는 것들이 있으면 되었지. 또 오늘은 오늘의 걱정이 있고, 오늘의 즐거움이 있다. 내일은 내일의 괴로움이 있겠으나, 내일의 행복이 있을 것이다. 나와 아내는, 우리의 고양이들은 오늘도 그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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