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고기
어린 시절, 엄마는 늘 대패 삼겹살보다 아주 약간 두꺼운 삼겹살을 아주 바짝, 거의 타기 직전까지 구워서 내어 주었다. 아마 돼지 기생충을 염려했던 것이었을테다. 그 삼겹살 구이에는 수분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질감이 바삭하다 못해 푸석푸석했다. 그런 삼겹살 조차도 어찌나 그렇게 맛있었는지. 고기, 기름, 고기, 기름, 고기, 기름의 층은 어떻게 조리되었건 맛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이가 조금 들고 집이 아닌 곳에서 다른 이들과 삼겹살을 먹으면서, 두툼한 삼겹살의 맛도 알게 되었다. 고기 부분은 쫀득했고, 튀겨진듯한 지방의 겉부분은 바삭했으며, 적당히만 익은 지방의 속부분은 그 특유의 아삭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가 도드라졌다. 삼겹살은 정말로 맛있다.
스무 살, 여자 친구와 같이 지리산 자락으로 열심히 별을 보러 다니던 시절, 같이 별을 보던 어른들은 우리가 내려올 때면 삼겹살을 한가득 사서 관측소에 오곤 했다. 다들 빠듯한 살림에도 통이 굉장히 커서, 네 명이 모이려면 8인분이 정도의 삼겹살, 쌈채소, 마늘, 고추, 그리고 술을 준비해 왔고, 자신들은 배부르다며, 어린 너네 많이 먹으라는 말에 뭣도 모르고 신나게 삼겹살을 먹곤 했다. 그러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면 신나게 별을 봤다. 술에 취하면 별이 더 잘 보인다는 낭설은 알고보니 진리였다. 그렇게 하늘이 다시 밝아올 때까지 관측을 하고, 아침에는 쓰러져 잤다. 한 여름, 여자 친구와 나는 삼박 사일정도 관측소에서 머무르며 별을 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하늘은 끝없이 비를 쏟아부었고, 우리는 관측소에 앉아 지리산 자락에 흐르는 구름만 쳐다보며, 쉴 새 없는 빗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어느 저녁, 여자 친구는 우리가 들어오며 사 온 삼겹살을 큼직큼직하게 잘라 관측소 냉장고에 남아 있던 김치와 함께 얼큰한 김치찌개를 끓였다. 처음으로 끓여본 김치찌개라고 했다. 그리고 비가 잠시 멎은 동안 관측소 마당에서 잘라 온 부추로 하트 모양의 부추전을 구워 주었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삼겹살을 먹을 일은 정말 드물었다. 처음 2년은 동안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피자나 소세지에 커피만 먹었고, 기숙사에서 나와서는 간장 계란밥과 볶음밥으로 열심히 돌려 막았다. 한인 마트에 가기엔 운전도 할 줄 모르고, 돈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쌀과 라면만 아마존에서 적당히 주문했다. 그래도 방학 동안 한국에 들어갈 때면 여자 친구에게 요리를 하나 둘 씩 배워, 적당한 알리오 올리오, 커리, 토마토 파스타는 해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언젠 무려 꼬꼬뱅을 해 먹기 위해 졸이던 중 졸아버려서 다 탄, 시커먼 닭다리를 먹었다. 그럼에도 딴엔 맛있게 먹곤 했다.
미국 마트에는 삼겹살을 전혀 팔지 않았다.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베이컨 뿐이었다. 영국이 괴상하고 맛 없는 음식으로 유명하다고 하나, 거기서 독립해 나온 미국도 요리에 관하여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삼겹살을 사려면 한인 마트에 가야만 했으나 나는 당시 운전 면허도 없었다. 이따금 한국인 친구 한 녀석이 나를 딱하게 여겨 삼겹살을 사다 구워주면 나는 아주 고마워하며 얻어먹었다. 그는 언젠가 내가 겁도 없이 100km의 거리를, 주를 넘어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펑크가 나서 돌아올 수 없게 되었을 때 두 시간을 운전해 나를 데리러 와 주기도 했다. 너무 힘들고 배고프겠다며, 파파이스 치킨과 비스킷이 담긴 큰 통을 나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그 때엔 돈을 아끼려고 핸드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아이팟 터치에서 간신히 그의 연락처를 찾았고, 정말로 운 좋게, 그 시골 한 가운데에서 지나쳐 가던 사람을 붙잡아 제발 전화 한 통화만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서, 어찌저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석사 생활을 마무리해갈 무렵, 대학원 결과가 일괄적으로 발표되는 날이었다. 학점, 그리고 대학원 시험을 위한 몇 년의 노력과, 몇 십 편의 지원 에세이와, 지원 수수료로 몇 천 달러를 쏟아 부은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지원한 28개의 대학원 중 단 한 군데도 합격하지 못했다. 다만, 다섯 군데가 나를 대기열(Waitlist)에 올려 놓았다고 알려 주었다. 학문에 진심어린 뜻이 없으나 애매하게 '공부'만 잘 하고, 주변의 기대로 여기까지 온 이의 말로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텅 비고, 한편으론 후련하며, 미련이 남았다. 그 날 저녁, 내 석사 지도 교수와 나를 돌봐주던 박사 과정 학생이 나를 불러 내었다. 한 30분쯤 택시를 타고 가니, 왠 '꿀돼지'라는 간판이 보였다. 'Korean BBQ', 그 중에서도 삼겹살 전문점이었다. 선천적으로 청각에 장애가 있는 교수님과, 원체 말이 없는 박사과정 대학원생과 우울한 나는 별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 다 비건(Vegan)이었다. 그들은 나보고 고기 많이 먹으라고 하고, 본인들은 열심히 반찬만 먹었다. 나는 원없이 삼겹살을 먹었다. 냉면도. 그들의 시크하고 따뜻한 위로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대학원에 합격했다. 학기가 시작하기 한 1주일 전, 대기열 자리가 난 것이었다. 그 후 아직도 학생 신분으로서 생활이 빠듯하지만, 가끔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차가 없을 시절, 자전거를 타고 코리아타운에 한 시간쯤 자전거를 타고 가서, 막걸리와 냉동 삼겹살을 사 오곤 했다. 파운드당 $5.99, 100g당 1600원 남짓한 삼겹살의 가격에 덜덜 떨었지만, 가끔씩 사 와서 먹으면 행복했다.
대학원 지원 과정 중 멀리 떨어진 학교에서 인터뷰를 할 때엔 어쩔 수 없이 1박 2일을 머물러야 해서, 금전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현재 재학중인 학생 집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모든 학교의 재학생들이 친절했지만, 내가 지금 머무르게 된 이 학교의 재학생들은 유난스러웠다. 인터뷰가 끝난 오후, 자정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기 전 나를 데리고 학교와 동네를 구경시켜 주고, 저녁엔 굳이 자신들 집에서 돈가스를 튀겨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학교에 다니게 되고부터 나에게 같은 요청이 들어오면 나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인터뷰에 대한 팁을 주고, 이 학교와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주고, 인터뷰가 끝이 나고 돌아가기 전, 나는 냉동 삼겹살을 부리나케 해동하여 구워 주었다. 마늘과 양파도 살짝 구워서, 밥과 같이.
존버는 승리한다고 했던가, 빠듯한 생활은 여전하지만,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그리고 아내의 알뜰한 살림에 힘을 입어 그래도 살만해졌다.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고부턴 한인 마트나 중국 마트에 가서 아주 싸게 식재료를 구해 오게 되었고, 김치찌개를 끓였주었던 나의 여자 친구는 아내가 되어 별의별 요리를 다 하게 되었다. 이는 아무리 푸짐하게 먹어도 하찮은 것을 사 먹는 것보다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줄어들고, 만족감은 넘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의 인건비로는 간간히 생기는 현금 몇 달러를 제공하는 정도가 다니 가성비가 국밥보다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는 한국 마트에서 삼겹살을 사다 먹곤 했다. 더운 여름 날 밤, 테라스에 앉아서 예능을 보면서, 촛불을 켜 놓고 파티를 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보아도 아내의 야무진 상차림은 언제나와 같다.
미국 마트에 삼겹살을 전혀 팔지 않는 것이 아이러닉하게도, 코스트코에는 한국 마트나 중국 마트보다 질이 좋은, 냉동도 되지 않은 삼겹살이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었다. 심지어 기업용 코스트코에는 10-15파운드쯤 되는 잘리지 않은 커다란 삼겹살 덩이가 파운드당 $2.99로, 100g당 800원도 채 하지 않는 가격이었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아내의 인건비를 포함하지 않은 가격이지만 말이다.
고기 써는 기계를 사고 나서는 우리의 고기 생활이 어마어마하게 달라졌다. 커다란 소 양지 덩어리나 통오리 등등 다양한 고기를 아주 싸게 사 구이용, 육수용, 수육용, 볶음용 등등 용도별로 썰어 놓고 몇 달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거의 매일 고기를 먹어도 한 달 식비가 200달러, 하루 7달러가 채 넘지 않았다. 커다란 삼겹살 덩어리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는 다양한 두께로 고기를 썰어내는 일이 꽤 재밌다고 하였다. 언젠간 이 덩어리 삼겹살로 베이컨을 만들어 보자고 이야기하였다.
구이용 삼겹살의 자태는 영롱하다. 상태가 너무 좋아서 저녁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자본주의의 상징같은 코스트코, 언제나 조금 마음이 미묘하지만 대용량으로 고기를 살 때엔 이만한 것이 없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삼겹살엔 늘 푸짐하게 야채가 곁들여진다. 고기를 구워 먹으면 먹을수록 야채는 더더욱 늘어만 간다. 올려도 올려도 부족한 달콤한 양파, 향긋하게 파, 산더미처럼 쌓인 마늘, 돼지 기름에 바싹 구워지는 감자, 고기를 먹는 건지, 야채를 먹는 건지 알 수 없다. 이 다음에는 더 많이 올려야지, 다짐을 해도 어째서인지 늘 야채가 모자란다.
요즘 우리 집엔 김치의 종류가 늘어만 간다. 최근 식구가 된 녀석들은 파김치와 갓김치로, 그 개성이 도드라진다. 파김치는 언젠가 내가 아내에게 고기와 같이 먹으면 맛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익었을 때 그 특유의 쉰 것 같은 시큼한 맛이 고기 기름에 지글지글 익혀지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는 파김치에 대한 별다른 경험이 없었으나, 나의 그 말에 담가주기로 하였다.
국물에 송송 썰어 넣던, 고기를 먹을 때 넓직한 대파를 같이 굽던, 파김치를 올리건, 나는 파를 아주 좋아한다. 연애하던 시절, 그에게 '너 파 좋아해?' 라고 물었는데, 그는 굉장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파'라는 것이 좋아하고 아니고 판단할 만한 재료인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그랬던 그는 이제 나와 같이 다퉈서 파를 먹곤 한다. 그 전에는 고기를 먹을 때 내가 마늘을 잔뜩 구워 먹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마늘을 먹기 시작하더니, 마찬가지로 요즘엔 마늘 전쟁이다. 고추도 그러하다. 그의 양파 고추 장아찌에는 고추가 계속 늘어만 간다. 나는 처음 먹었을 때부터 고수가 너무나 입맛에 맞았다. 그 샴푸향이 좋았다. 아내는 처음에 질색을 했었는데, 왠지 점점 그의 요리에 고수가 늘어만 간다. 더 향이 강한 줄기마저도 신나게 뜯어 먹는다.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족발, 쫄면, 쭈꾸미를 좋아하게 되고, 죽어도 못 먹을 것 같던 오이향에 익숙해져 간다. 그가 좋아하는 버섯도 좋아하게 되면 좋을텐데, 아직 그 길은 멀다.
삼겹살 한 점에 기름장을 뭍이고, 돼지 기름에 잘 구워진 파김치 한 입, 강렬한 시큼함이 삼겹살의 고소함과 너무나 잘 어우러진다. 아내가 무슨 맛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가는 아내가 빚은 청국장으로 끓인 찌개, 그리고 그 안에 든 그의 손두부는 고소하기 그지없다.
캠핑이면 고기지, 라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은 메뉴다. 미리 손질을 해야 하고, 냉장이 필수이며, 누군가(아내)는 계속 구워야 하고, 고기를 먹고 난 뒷처리는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캠핑을 다니면서 고기를 지글지글 구워 먹은 적은 많지 않다. 캠핑 필수 음식인 고추장 찌개를 끓일 때는 늘 넣지만 말이다.
COVID 사태 직전 마지막으로 비숍(Bishop, CA)에서 원없이 클라이밍과 캠핑을 즐길 때, 아내는 고기를 구워 먹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바로 꼬치구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고기 덩이와 야채를 꼬챙이에 잘 끼워 두고, 어둠과 추위가 찾아올 때쯤 불을 활활 피워 그 위에 여럿 올려 두면 몸도 따뜻하고, 구울 때 할 일이 줄고, 뒷정리 할 것도 얼마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가 꼬치 구이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과연 그럴까 싶었다. 한 시간 정도를 야채 손질을 하고, 꼬치에 하나, 하나 야채와 고기를 꿰었다. 할만하다고 하니 그러려니 할 수 밖엔 없었다.
어찌되었건 나야 감사할 일이다. 구수한 고기 기름에 달콤한 야채가 고기와 함께 익어가는 냄새는 어마어마했다. 먹을 만큼 꼬챙이를 불에 올려 적당히 돌려 가며 구우면 되니 구울 때만큼은 조금 할 일이 적은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구워진 삼겹살은 불판 위에서 굽는 것과는 또 다른 세상의 맛을 보여주었다. 그 뜨거운 직화 열과 삼겹살 자체 기름에 튀겨지듯 겉은 아삭바삭하게 구워졌고, 뭉툭하게 썰린 고기를 씹으며 느껴지는 쫀득함 사이로 육즙이 흘러나왔다. 고기에는 야채 향이 배었고, 야채에는 고기 향이 가득했다. 다 먹고 나서 꼬챙이는 불에 잘 지져서 정리했다.
비숍에서의 캠핑이 그립다. 신나게 클라이밍 하던 것이 그립다. 그 풍경이 그립다.
아내가 열심히 정리해둔 삼겹살 한 뭉텅이를 꺼냈다. 금요일은 파티다. 집안에 기름이 튀는 것도, 냄새가 배는 것도 싫고, 다 구워놓고 차분히 앉아 예능이나 보며, 술이나 마시며 거나하게 저녁을 먹고자 집 앞 그릴에 주물팬을 달궜다.
작정하고 산더미로 야채를 쌓았다. 양파, 감자, 산더미같은 마늘.
그릴을 하는 우리를 보리와 구름이가 바라만 본다. 내 새끼들.
집 앞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가 잔뜩 모델로 맥주를 버려 놓아, 덕분에 우리는 횡재했다. 멕시코의 국민 맥주는 냉동실에서 아슬아슬 얼기 직전까지 시원해져 있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같이 열심히 클라이밍도 했고, 보송보송하게 샤워도 했고, 배고프고 신난 우리는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이 무침이었다. 파, 콩나물, 그리고 고수 무침. 고소한 콩나물, 시원한 파, 거기에 아주 상큼하면서 신선한 맛을 더해주는 고수의 매콤한 조합은 기름지고 구수한 삼겹살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가 본적도 없는 베트남 어디론가 나를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마늘 한 점, 고추 한 점, 장아찌 한 점 집어 먹으려니 내가 이번 주 내내 그렇게 힘들어하고 스트레스 받았던 것이 쓸려나갔다.
구수한 누룽지는 밥보다도 더 잘 어울린다.
야무진 한 쌈.
삼겹살을 구워 먹을까, 타코를 먹을까 고민했던 저녁이었다. 둘 다 흥겹게 먹는 축제스런 음식이다. 당장 준비하기에 없는 것도 있고 손이 많이 가는 타코는 다음으로 미루고 삼겹살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쌈을 싸서 삼겹살을 먹고 있으려니, 이 또한 타코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옥수수향 머금은 또띠아는 아니지만, 상추로 바닥을 깔고, 기름기 좔좔 흐르는 삼겹살을 올리고, 살사 대신 쌈장, 양파, 고추, 한국인이만큼 마늘을 얹고, 고수 가득한 과카몰리 대신 고춧가루에 버무려진 콩나물, 파, 그리고 고수가 올라간 무침을 얹었으니 그게 그것이 아닌가 싶었다. 오늘도 세상의 음식은 돌고 돈다. 세상이 음식만 같았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