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빙수 Jun 21. 2020

술상 이야기

오늘은 마시는 날이다.

 늦은 오후, 왠지 모를 피곤함을 안고 집을 나섰다. 암장들이 단계적으로 재개장을 시작하였으나 문을 닫은 동안 계속 돈을 기부하던 이들만 이용할 수 있는 요즘, 자연 바위라도 오르기 위해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 시간대에 맞춰 집에서 25분 즈음 떨어진 스토니 포인트 공원(Stoney Point Park)을 찾기로 했다. 한껏 햇빛을 맞고, 바위에 매달려 내 몸의 무게를 느끼면 그래도 신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나온 지 고작 3분, I-10과 405의 인터체인지를 지나자마자 우리를 기다리던 것은 어마어마한 교통 체증이었다. 금요일 오후라 조금은 교통량이 많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했었지만, 이 COVID 사태 이후론 고속도로가 늘 한가했기에 체크도 해 보지 않고 떠나기로 한 나의 불찰이었다. 부리나케 구글 맵을 켜 보니, 평소에 비해 두 배도 넘게 걸려 도착할 예정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곤, 짜증과 조급함으로 가득하여 양보해줄 생각이 없는 차들 사이를 잘 비집고 1차선에 들어섰다. 나도 확 짜증이 몰려왔다. 내가 이제야 조금 쉬고 스트레스 풀자고 나왔는데, 이렇게도 길이 막히다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세상이 살만한 척을 하기 시작한 이번 주,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거나, 혹은 갇혀있던 일상에 지쳐 숨통을 트고자 하는 이들이 고속도로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론 COVID 상황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죽어나간다. 그럼에도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이유로 중앙 정부와 지자체는 제재를 계속 완화한다. 그렇게 완화된 규제에도 '자유를 침해'한다며, 바에 가야 한다며, 네일을 해야 한다며, 마스크는 답답하다며 누군가는 시위를 하고, 소송을 건다. 또 그 와중에 인종에 관한 문제는 커져만 간다. 많은 흑인들이 계속 죽어나간다. 동양인들은 여전히 바이러스의 근원으로 여겨지면서, 동시에 특권층으로 취급되면서 누구에게도 불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짜증이 난다.

 '다음에 가자, '하고 핸들을 돌렸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시 다섯 차선을 건너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러자고, 집에 가서 쉬라며 아내가 트레이더조에 내려달라고 얘기했다. 내가 전에 봤던 예쁜 식물들을 구경할 겸, 산책을 하고 싶다고 했다. 트레이더조 주차장에 들어서니 줄이 굽이굽이 길었다. 아내가 탄식을 한다. '아 진짜 이게 또 뭐야.' 근처 다른 트레이더조로 향했으나 마찬가지였다. COVID 사태 초기에 비하면 기다릴 일이 많이 줄었었는데, 'Father's Day' 주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몰린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아프고 차별을 당해도 그놈의 경제, 소비를 위해 기업은 평소보다도 줄기차게 광고를 하고, 국가는 이후 인플레이션이야 어떻게 되던 일단 마구 돈을 뿌린다. 자본에 지배되는 시스템에 짜증이 난다. 

 일상의 피곤한 부분들만 돌아오고, 정작 필요한 일상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치고 있다.

 매년 호미를 그리며 좋은 술을 사곤 한다. 그러나 올해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 날이 너무 덥고 잠깐 바빴던 사흘의 시간이 지난 후, 약간 늦었지만 막걸리를 빚어 걸러 놓았다. 호미를 생각하며 조금 특별하게 막걸리를 빚어보고 싶어, 평소 만드는 막걸리에 블랙베리를 끓여 넣어 발효해보았다. 붉은 선홍색 빛깔이 너무나 탐스러웠다. 기본 막걸리와는 다르게 턱관절이 시큰거리는 상큼함이 아주 인상 깊었다.


 드라이브만 실컷 하고 집에 왔다. 아내가 말했다.

 '이런 날엔 그냥 밥만 먹을 순 없어. 술 먹자, 와인이랑 막걸리랑!'

 '아 진짜, 그러자. 맛있을 거야.'


 술상을 차릴 준비를 하던 아내가 베란다로 향했다. 

 '아, 그리고 술도 좋지만, '이라고 얘기하며 그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꼭 안았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눈물 몇 방울을 흘리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익숙한 그의 향기가 너무나 따뜻했다. 그는 울다 웃으며 아르굴라와 오레가노를 따 왔다.

 '방 정리를 할 거야! 그리고 술 먹어야지!' 하면서 낑낑대며 방에 있던, 우리 집에 흔치 않은 원색의 빨강, 초록, 노랑의 화려한 서핑 보드를 꺼내 왔다. 주차장에 꺼내 놓을 모양이었다. 그 색깔의 조합이라고 하면 틀림없이 레게 음악이다. 잘 듣지도 않지만 유튜브에서 레게 음악 플레이스트를 틀어놓고, 몸치 둘이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며 울다가 웃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 찬란하고 따스하게 빛나는 라벤더와 수국에 감탄하며 같이 보드를 옮겼다.

 이번에도 잘 빚어졌다. 달콤하면서 상큼하며 알싸한 알코올의 향이 느껴졌다. 블랙베리 막걸리의 일부는 딸기 컴포트를 더해 숙성시켜 더욱 달달한 맛과 탄산을 더해 보았다.

 아침에 잠깐 열어 두었더니 우리 복이가 궁금해하는 듯 무서워한다. 앞발로 톡톡, 치다가 냄새를 맡고는 저만치 떨어져 앉아 지켜만 본다. 시큼한 알코올의 향이 부담스러운가 보다.

 다른 녀석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잠깐 냄새를 맡다가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뒷걸음을 친다. 이 좋은 것을.


 와인으로 오늘의 술상을 시작했다. 온갖 채소에 삶은 계란, 발사믹 소스, 그리고 머스터드를 올린, 가볍지만 풍미 가득한 샐러드, 그리고 노릇하게 구워낸 브로콜리, 양파, 새우, 버섯. 한 잔의 와인에도 살짝 술기운이 돌고 신이 났다. 맛있다.

 본격적으로 막걸리를 꺼내어 술판을 벌인다. 바삭하게 구워낸 황태채에, 마요네즈와 맛간장에 매운 고추를 한껏 다져 넣은 아내의 특제 소스에는 막걸리만 한 것이 없다. 막걸리의 달콤함, 상큼함, 그리고 알코올의 짜릿함과 황태채의 꼬릿꼬릿한 구수함, 짭조름한 감칠맛, 바삭한 식감이 잘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다.

 '크아! 술이라도 신나게 먹어야지! '라고 말하는 아내가 하늘하늘 흔들린다.

 나는 발효한 막걸리 원액 그대로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보드라운 쌀의 달콤함에 블랙베리의 상큼함이 턱을 아리게 한다. 베이스 핑거 슬랩을 하듯 짜릿한 알코올 향이 느껴진다. 농도가 9-10% 즈음되는 것 같다. 아내는 탄산수와 설탕을 살짝 더했다. 아내의 것을 먹어 보니, 이것은 왠지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단 맛이 더해지니 블랙베리 과즙을 더한 것 같았다. 화학 감미료의 인공적인 맛이 가득한, 그러나 맹맹한 국순당 과일 막걸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파는 음식이나 술이 당연히 맛있으니까 그렇게 팔리는 줄만 알았다. 분명히 처음에는 그리하였을 것이다. 술이건, 빈대떡이건, 바구니건, 작물이건, 고기 손질이건, 떡이건, 두부건, 심지어 학문이건 자신이 잘하는 것에 집중을 하면서 전문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턴가 그것들이 팔리는 이유는 팔 수 있는 시스템과 자본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굳이 그 질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큰 자본이 있는 이들이 최대한 생산 가격을 낮춰서, 그들이 만드는 제품보다 낮은 임금을 제공해 가며 많은 것들을 생산하며 이윤을 가져가는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그 자본주의의 체계에 맞서 싸우는 많은 소규모 음식점, 빵집, 양조장, 브루어리들이 많이 생겨나는 요즘 추세는 반갑다. 그러나 이 중의 많은 작은 기업(small business)들이 이윤을 남기지 못해 망하곤 한다. 때론 충분한 질을 갖추지 않았음에도 커다란 자본을 뒤에 업고 '로컬', '소규모'의 이름만 차용하여 코스프레를 하기도 한다. 한편 훌륭한 질로 시작한 소규모 기업들이 대기업에게 인수당하며 급격하게 품질을 잃게 되는 경우도 많다. 아무리 '카스'나 '하이트' 맥주가 맛이 없어도 최대로 소비되는 맥주로 남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도 아내가 '우리 이거 장사할까?'라고 내 눈을 쳐다보면서 말해준 것은 기분 좋았다. 나의 세계에서 중요한 사람은 나와 그 둘 정도인데, 그렇다면 내 세계의 반이 내 막걸리가 그 정도로 맛있다고 해 주니 그만한 것이 있나 싶었다. 그는 내가 만드는 빵을, 내가 치는 피아노를, 내가 굽는 와플을, 내가 찍는 사진을, 내가 빚는 막걸리를, 그리고 아마도 나를 좋아해 주니, 세상이 아무리 나를 못살게 해도 괜찮은 것 같다.

 '사업'은 하기 싫지만 '장사'는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우리는 얘기한다. 이윤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투자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 적당히만 팔 수 있는 구조에 대해 꿈을 꾼다. 모든 것이 제공되고, 돈 걱정을 할 일 없이 국내건 해외건, 음식을 만들어 내는 요즘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처럼 말이다. 그 연예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을 위치에 오르기까지는 물론 아주 많은 고생을 했겠지만, 그들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별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실컷 하며 웃다가 마지막으로 막걸리 한 모금 짠, 한다. 마침 아내의 옷도 막걸리처럼 선홍색이다. 처음 연애를 할 때부터 아내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색깔이다. 그의 냄새가 한가득 배어 있는 색이다.


 신나게 술을 마시고, 열심히 설거지를 마친 우리는 오후에 느꼈던 짜증이 무색하게 신이 나서 장을 보러 갔다. 새로 빚을 만두 재료, 과일, 야채, 그리고 영업을 마감하며 정리하던 도중에도 친절하게 챙겨주신 고등어 두 마리를 사 왔다. 돌아오는 길, 누가바에서 고소한 달콤한, 어렸을 때의 맛이 났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챙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