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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Sep 19. 2020

콩나물 국밥 이야기

'크어어어어!'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 저녁만 되면 아내와 나는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취미 생활'을 한다. 바로 마트 전단지를 보는 일이다. 말이 전단'지'지 마트 홈페이지에 등록되는 PDF 파일이다. 인터넷 브라우저 즐겨찾기 탭의 '마트' 폴더를 클릭하면 고이 보관된 여러 한국 마트 전단지들이 한 번에 떠 빙글거리는 아이콘과 함께 로딩되는 그 시간은 참 이상하리만도 설렌다. 마치 대학 합격 확인하는 날 자정부터 괜히 새로고침을 몇 천 번 누르듯, 어차피 수요일 밤 늦게면 확실하게 모든 마트들의 전단지가 올라올 것임에도, 그걸 못 기다리고 괜히 오후 세, 네시부터 한 번씩 들여다보며 이젠 거의 외우다시피 하게 된, 지나간 주의 전단지를 마주한다. 그러다 어쩌다 일찍 전단지가 올라온 날이면 남들보다 이 할인 품목들을 먼저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에 조금은 짜릿하기도 하다. 아이고, 좋기도 하겠다.

$40 어치 장

 기본적으로 식재료들이 싼 한국 마트지만, 주로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특별히 할인하는 품목들이 있다. 그리고 그 할인의 정도가 꽤 커서 행사를 하지 않을 때 제 값 주고 사는 것이 왠지 아깝게 느껴지곤 한다. 양파는 5파운드에 99센트, 파는 10단에 99센트, 사과나 복숭아, 자두는 2파운드에 99센트, 양배추는 가끔 7파운드 99센트, 막갈비 1파운드에 79센트, 한여름엔 수박 커다란 한 통에 $4.99 등등, 이제는 어느 계절에 어떤 품목이 할인하는지 트렌드조차 익혀가는 것 같다. 이제 곧 밤이나 감 등이 싸지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정도로만 주식 판을 읽을 수 있어도 주식을 한 번 시작해 볼 텐데... 그렇지 못하니 열심히 마트 전단지를 보며 조금씩 아껴 알뜰하게 먹고사는 일이 나에게 맞다.

 이렇게 전단지를 보고 아내는 마트마다 그 주에 사야 할 품목의 목록을 정리한다. 그에 따라 운이 좋으면 마트를 한 군데만 가도 되고, 주로 두 군데, 아주 특수할 때엔 세 군데까지도 들르게 된다. 언젠가 마트를 네 군데도 들려본 적 있는 것 같다. 얼마나 아낀다고 그렇게까지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식재료는 아주 꾸준히, 계속 돈을 지출하게 되는 품목이다. 그만큼 반복적인 지출에 있어 조금씩 아끼는 것이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큰 절약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먹을 것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장을 보러 가는 것은 제법 신나는 데이트다. 전단지를 봤으니 이미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싸게 양파를 살 수 있는 것에 새삼 다시 놀라고, 유난히 상태가 좋은 사과를 만나게 되면 괜히 몇 개를 더 담는다. 사 본 적 없는 새로운 재료나 뜻밖의 좋은 물건들을 발견하게 되면 반갑고 왠지 뿌듯하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만두나 돈가스, 소세지, 카레, 라면 등등, 판촉 행사 코너를 돌며 시식을 하면 그것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가끔씩은 옷도 예쁘게 입고, 클라이밍을 하느라 평소에 끼지도 않는 결혼반지를 끼고 장을 보러 가기도 한다. 요즘은 아내의 운전 연습 겸 그렇게 한국 마트에 가니, 그 효용성이 더더욱 높다.

 되돌아보면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장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가끔씩 한국에서 머무를 때면 집에 들어갈 때 (이제는 내 돈으로) 이마트 지하에서 식재료를 사서 가곤 했다. 그 전에도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내내 혼자, 혹은 엄마와 같이 장을 보는 것은 일상의 일부였고, 시장에서, 백화점이나 이마트 지하에서 과일과 야채와 고개와 생선과 과자를 구경하고 사는 일이 참 즐거웠다. 더 기억을 거슬러가면 여섯, 일곱 살 무렵, 엄마의 부탁으로 집 앞 가게로 심부름을 종종 다녔던 기억이 난다. 1000원어치 두부를 사고 1000원어치 콩나물을 사고 나면 가게 아줌마는 심부름 값이라며 내게 500원을 도로 주셨는데, 그럼 나는 그 옆 슈퍼에 가 아이스크림 냉동고를 한참 들여다보다 더위사냥을 하나씩 사서 물고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사 온 콩나물은 거의 늘 콩나물국이 되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맑은 콩나물국도 가끔 먹었지만, 언제부턴가 항상 식탁에서 보이던 것은 빨간 김치 콩나물국이었다. 아침에 밥을 먹기 좋아하지 않던 나였지만, 깔끔하고 시원하며 시큼 매콤한 콩나물국과는 맛있게 먹곤 했다. 반면 어디 식당에 가서 콩나물국을 먹으면 하얀 국물에 매콤함은 없는 대신, 입에 착착 감기는 감칠맛이 놀라웠다. 미원을 비롯한 조미료의 힘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전혀 조미료를 쓰고 싶지 않아 하던 엄마의 콩나물국에는 본인의 요리 노하우와 천연 조미료의 발달에 따라 감칠맛까지 더해져 점점 더 맛있게 변해간 것 같다. 콩나물국과 더불어 북어국과 육개장은 나의 최애 국들이었는데, 이 취향을 보면서 어른들은 내가 술꾼이 될 것이라고 누누이 얘기했다. 정말 그렇게 될 줄이야.

 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은 어릴 적부터 아주 좋아했지만, 보글보글 뚝배기에 끓여져 나오는 '국밥'을 먹게 된 것은 제법 크고 나서였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아빠는 국밥류의 음식을 썩 좋아하지 않았고, 엄마는 아마 내적으로는 좋아했어도 아빠도 안 좋아하고 애들은 어렸으니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여자 친구와 별을 보러 다니며 먹던 지리산 자락 덕산 시장의 세계 최고 돼지국밥이나, 아주 추웠던 겨울날, 종로 청계천 옆길에서 그와 데이트하며 먹었던 신선 설농탕이나, 그와 지리산 종주를 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구례로 내려가다 내릴 역을 놓쳐 순천까지 내려가 다시 올라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순천 중앙 시장에서 먹었던 너무나 푸짐한 순대 국밥이나, 건대 입구 역에서 같이 스타크래프트를 하던 형들과 뽈살과 같이 먹었던 술국 등등 다양한 종류의 국밥을 찾아 먹고 다니게 되곤, 한국에 들어갈 때면 엄마와도 국밥을 종종 먹었다. 참 바뀌지도 않는 풍경을 가진 내가 자랐던 동네, 그 어느 상가 2층에서 순대국을 두 개 시키면 엄마는 매운 다데기를, 나는 고소한 들깻가루를 잔뜩 넣어 먹곤 했다.

아내의 콩나물 국밥, 참기름과 김이 올려진 수란.

 콩나물 국밥을 처음 먹어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려 콩나물 국밥의 성지 전주에서였다. 나는 40-50명 정도 규모의 학교 관현악단 동아리에 바이올린 파트로 소속되어 있었고, 우린 그 해 힘을 쓴 악장 선배와 고문 선생님 덕에 전주에서 열리는 '전국 청소년 동아리 경진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두어 달 정도, 수업 시작하기 전에, 야자가 끝난 후, 여름 방학이 찾아오자 따로 시간을 내어 학교 체육관에 모여서 제법 치열하게 열심히 준비를 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오래 한 데다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 동아리에서 악장을 도와 파트 구성, 편곡 등 여러 일들을 맡았기에 그 무대에 서는 것이 꽤나 뿌듯했다.

 그렇게 어느 늦은 여름, 고속버스 한 대를 대절하여 전주로 내려갔다. 어떤 음악을 연주했는지 멜로디는 여전히 전부 기억이 나는데, 그 곡의 제목은 도저히 떠오르지를 않는다. 시간과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고, 기억은 조금씩 풍화되어 간다. 우리는 금상을 받았고,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신이 나서 난리가 났다. 나는 의외로 차분한 기분이었다. 그간 밤새 악보를 고치던 기억이 눈 앞을 스쳐갔다. 악장 선배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도 이제 끝났다는, 홀가분해졌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고문 선생님이 자신이 쏜다며 우리를 전주 한옥 마을 근처, 콩나물 국밥 집으로 데리고 갔다.

 콩나물국이야 많이 먹어보았지만, '콩나물 국밥'이라는 식문화는 처음이었다. 국밥과 따로 나오는 반쯤 익은 계란에서는 참기름 향이 한가득 올라왔고, 거기에 김을 뿌려 먹으라고 거기 할머니께서 얘기해 주셨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소하고 감칠맛이 가득했는데, 콩나물 국밥의 국물까지 몇 숟갈 부어서 먹으니 그 계란만으로도 한 끼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콩나물 국밥에는 콩나물이 정말 산더미처럼 들어 있었고, 청양 고추가 그렇게나 많이도 다져져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난생처음 보는 물컹해 보이는 시뻘건 무언가가 얹어져 있었다. 오징어 젓갈이란다. 음식을 많이 가리던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이걸 어떻게 먹나 생각하던 참, 주인 할머니는 꼭 먹어봐야 한다고 했다. 웬걸, 짭조름하면서 매콤한 맛, 그리고 쫄깃쫄깃한 식감이 너무나 좋은 것이었다. 그 뜨겁디 뜨거운 콩나물 국밥은 청양 고추와 오징어 젓갈 때문에 먹으면 먹을수록 뜨거워졌고, 너무나 맵게 느껴지는데도 먹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맵고 뜨겁고 시원하고 감칠맛이 한가득 담긴 그 뚝배기를 통째로 비웠다. 비단 나만 매운 것은 아니었는지, 많은 부원들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땀을 닦았다. 주인 할머니는 가게 옆 뻥튀기집에 가 사람 하나는 넉넉히 들어갈 강냉이 커다란 포대 하나를 우리에게 주었다.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다들 그렇게 강냉이를 먹었음에도 다 못 먹고, 유난히 강냉이를 좋아하던 첼로 녀석이 집에 가지고 돌아갔다.

 해가 지나 윗 기수 선배들이 고3이 되고 우리 기가 직책을 맡게 되었을 때, 악장 선배를 많이 도왔던 내가 악장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주변에서 많이 했다. 그에 반해 실제로 악장이 된 것은 예술 중학교 출신이었던 바이올린 파트 동기였는데, 나는 이에 딱히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윗 기수를 보았을 때에도, 악장 선배는 일을 아주 많이 하거나 자신의 악기(바이올린)를 특별히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겐 신기한 포용력과 리더십이 있어 동아리의 많은 사람들과 그 안의 수많은 충돌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에겐 개인적인 일머리나 음악적 자질은 있었지만 감정의 기복도 크고, 무엇보다 타인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그렇기에 타인과 문제가 생겼을 때 잘 조율하여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나도 선배도 내가 그런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윗 기수 선배들이 고3 생활로 '은퇴'하는 마지막 이벤트로 선배가 후배에게 마니또 선물을 주기로 했다. 나는 <언니네 이발관> 2집 <후일담> 앨범을 선물로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악장 선배였다. 그 이후로 딱히 연락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언니네 이발관>은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이다.

처음으로 집에서 담근 막걸리와 함께하는 아내의 콩나물 국밥

 아내가 집에서 처음으로 콩나물 국밥을 준비한 것은 우리가 집에서 처음으로 막걸리를 담았을 때였다. 달콤 시큼한 막걸리가 마치 여느 콩나물 국밥집이라면 준비되어 있는 모주처럼 느껴져서였던 것 같기도 하고, 며칠 연속 막걸리를 먹게 될 것 같으니 해장하는 기분을 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산더미 같은 콩나물은 기본이고, 거기에 오징어, 그리고 황태채까지 담아 우려낸 육수의 감칠맛은 어마어마했다. '크어!' 거기에 막걸리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해장을 하라는 국밥인지, 술을 더 마시라는 국밥인지 알 수 없었다.

 돼지 국밥이야 같이 지리산에 별을 보러 갈 때마다 먹었지만, 그와 콩나물 국밥을 먹어본 것은 두어 번 정도 뿐인 것 같다. 따뜻한 듯 차가운 노란 햇빛에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던 어느 춥디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 일산 한가운데 있는 프랜차이즈 <전계능 국밥>에 들어가 우리는 추위로부터, 술로부터 해장을 하기로 했다. 글을 쓰며 그 전 날 밤에 어쩌다 그렇게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 아내와 같이 기억을 더듬어보다, 아주 깊숙이 묻혀 와해될 뻔하던 기억의 조각을 찾아내었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한 반년쯤 되었을 무렵, 겨울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갔을 때 아내를 따라 암장에 갔다. 실력이 느는 것이 느껴져 한참 클라이밍이 엄청나게 재미있을 즈음, 거기에 친목질이 더해지면 그렇게나 신날 수가 없다. 신나게 운동을 하고, 바에서 1차를 하고, 편의점 앞에 앉아 진탕 맥주를 마시며 2차를 하다 보니 벌써 새벽 네시, 여자 친구는 필름이 끊겼고, 나는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그와 같이 집으로 갔었다. 이 얘기를 하다 아내가 내게 물었다. '내가 그때 토했나?' '어, 내가 봉지 잡아줌.' 크, 젊은 날이여!

 또 한 번 같이 콩나물 국밥을 먹은 것은 저 멀리 영광에서였다. 아내와 내가 긴 연애 끝에 결혼을 하기로 했을 때, 아내의 부모님은 굉장히 쿨하게 그러라 하신 반면 정작 내가 더 어려워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아내가 아직도 종종 연락을 주고 받는 아내의 은사님들이었다. 아내는 그에게 소중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중학교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선생님들과 아내, 내가 직접 만나 결혼을 할 것이라는 얘기를 직접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어느 추운 겨울날 고속버스를 타고 영광으로 내려갔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터미널 건너편 파리 바게트에서 빵을 한 꾸러미 사, 처음으로 차를 렌트를 해 아내가 다니던 중학교에 갔다.

 선생님들은 마치 아내가 아직도 학교를 다니는 마냥 반갑고 친숙하게 그를 맞아주었다. 나는 여러 건물을 돌며 아내의 선생님들을 한 분씩 뵐 때마다 조금은 긴장이 되었지만, 내가 모르던 아내의 과거, 그가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던 사람들, 공간, 그가 머물렀던 기숙사, 그가 신나게 밥을 먹었던 급식소 등등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되는 것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했다.

 아내의 여러 은사님들 중, 항상 아가일 체크 무늬 스웨터를 입으신다는 수학 선생님은 마치 아내의 두 번째 아버지같은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내를 아주 예뻐하시고, 신경써주시고, 그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시던 분이었다. 그런 분을 만나는 일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인정받고 싶었다. 아내와 나, 그 선생님은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무서운 분은 아니었지만, 그 분의 마음에 닿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한동안 나에게는 말도 놓지 않으시고, '너가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냐'는 질문들이 에둘러 돌아왔다. 그 사이 술병은 쌓여만 갔는데, 의외로 나는 멀쩡했다. 평소같으면 소주는 한 병도 간신히 먹을텐데, 아무래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 보다. 셋이서 대여섯병쯤 마시고 나니, 아내는 잠들어버렸다. 이제 리얼 토크의 시작이었다. 이래저래 질문은 계속되었고,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것이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요?'

 정말 짧지만, 무거운 질문이었다. 아마, 아내와 아주 다른 삶을 살아온 내가 그와 같은 방향을 보고 살아갈 수 있겠는지 물으신 것이었던것 같다.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을 했다. 내 속은 모르고 옆에서 곯아 떨어진 아내를 보며.

 '얘와 하루 하루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열심히? 아니 그렇게까지 열심이지 않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한참 웃었고, 나도 같이 웃었다. 

 '괜찮은 놈이네 이거!'

 뭐가 괜찮은진 잘 모르겠으나, 그제야 말을 놓은 선생님과 두어병 소주를 더 깠다. 그냥 둘 다 술에 취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살면서 소주를 가장 많이 먹은 날이었던 것 같다. 그 때까지 아내는 여전히 잘도 자고 있었고, 나는 그를 업어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서 세상을 원망하며 일어난 그 다음 날,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서울에 올라오기 전, 터미널 바로 옆 국밥집에서 콩나물 국밥을 먹었다. 여전히 춥디 춥지만 맑고 쨍한 날, 콩나물 국밥 향기 가득한 입김은 새하얗고 뜨거웠다.

 그렇게 콩나물 국밥을 한 술 입에 넣으니 늘 그렇듯 '크어ㅓ!' 하고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알콜에 잠겨 배배 꼬여 있던 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콩나물의 이런저런 아미노산이 숙취에 좋다는 말이 있다더니, 매번 이렇게 콩나물 국밥을 먹을 때마다 정말 그런 것만 같다. 이것에 정말 근거가 있는 말인가 궁금해져 논문을 찾아보았으나 의외로 연구된 결과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어떤 회사에서 콩나물 속 아미노산들이 이론적으로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들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가설 하에 '특허'를 내어 놓은 것뿐이었고, 그마저도 이미 유효 기간이 지난 후였다. 숙취에 대한 또 다른 논문에서는 콩나물이 숙취에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인용을 하였으나, 그것에 대한 소스는 달아두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언론들은 이를 기반으로 기사를 냈고, 그것은 수많은 블로그나 개인 글로 더 퍼졌고, 이제 우리는, 마치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혀 양 옆은 신 맛, 뒷 쪽은 쓴 맛을 느낀다는, 다리를 떨면 복이 달아난다는 미신처럼, 콩나물이 숙취에 좋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콩나물 국밥을 먹으면 언제나 그렇게도 시원하고 숙취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과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면 그 효과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동양 의학이 받아들여지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나는 어릴 때 아주 쉽게 체를 했고, 그럴 때 손을 따면 매번 괜찮아지곤 했다.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는 플라시보 효과라고 하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발목을 접질리거나 할 때면 정형외과에 가는 것보다 침을 맞을 때 늘 더 빨리 회복했던 기억이 난다. 요가나 명상 같은 개념은 또 어떠한가. 기가 흐르니 어쩌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지만, 요가의 아주 작은 일부인 아사나를 하루에 10분 정도만 수련해도 나의 몸과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물론 호흡이나 정신 등 고차원적 얘기로 올라가면, 무지한 나에겐 여전히 무슨 컬트적 개념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클라이밍이 우울과 불안에 아주 큰 효과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기에는 참 어려운 일인 것이다.

 한동안 나는 과학만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떠한 사실이 실존하더라도 과학이라는 도구로 관측할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하고, 그렇기에 과학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용하여 그릇된 방식으로 사람을 꾀고, 속이는 것은 더더욱 못된 짓이지만 말이다. 즉, 과학적인 증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는 콩나물이 내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를 가지고 '콩나물 액기스'를 만들어 이는 숙취에 최고이니 한 병에 5만원이다, 하며 판다면 그것은 글쎄, 사기꾼이다.

 한국 마트에 갈 때면 그때 그때 한 번, 혹은 두 번 먹을 콩나물 작은 봉지를 사 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눈에 밟히는 것이 그 옆에 있는 커다란 콩나물 봉지였다. 무려 5파운드나 되는 콩나물인데, 작은 봉지를 사는 것에 비해 가성비가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았다. 그러나 워낙 많으니 혹시 다 못 먹고 버려질까 매번 고민만 하며 사지 못하다가, 어느 날 아내가 콩나물을 무르지도 쉬지도 않게 몇 주간 보관하는 방법을 알아내었다. 거기에 콩나물 무침이건, 콩불 스타일이건, 삼겹살에 곁들이는 파, 고수, 콩나물 무침의 형태건, 콩나물국이건, 콩나물밥이건, 어차피 콩나물을 아주 많이 먹는 우리이기에 한 번쯤 그 커다란 5파운드짜리의 콩나물 봉지를 사 오기로 했다. 2.2kg의 콩나물 포대라니. 왠지 마음이 풍족한 것이었다.

 압력밥솥에 폭폭, 고슬고슬하게 지어낸 하얀 밥에는 고소한 냄새가 난다.

 푹 삶긴 콩나물은 여전히 탱글탱글해 보인다. 그 안에 시원한 국물을 잔뜩 머금고 있을 것이다. 

 국물의 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침이 나고 한껏 배가 꼬르륵거린다.

 깨끗한 숟가락을 들어 김이 잔뜩 올라간 수란을 한 숟갈 뜨면 참기름 냄새가 확, 올라온다. 아내가 여기만큼은 한국에서 보내져 온 '비싼' 참기름을 아낌없이 올린다. 매끄러운 계란의 질감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더 부드러운 참기름의 식감, 김의 바삭함, 고소함, 감칠맛이 입에서 섞이고 있으려면 삼키기가 아까워진다. 아쉬움을 달래며 콩나물 국밥의 국물을 몇 숟가락 떠 넣어 섞은 뒤 수란을 두 숟가락 째 먹으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국밥 국물의 그 시원함이 더해져, 어서 국밥을 제대로 푹푹 떠서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국밥 국물만 떠먹어보니 역시 '크어어어어!' 너무나 시원하고 개운하며 입에 감긴다. 아내의 국물은 날이 갈수록 복잡해서 그 맛의 근원을 구분할 수가 없어진다. 기본적으로는 다시마에, 그가 그동안 버섯, 새우, 멸치 등 잘 말려서 빻아 만든 천연 조미료를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콩나물을 정말, 아낌없이 팍팍 넣고 끓이면 이런 맛이 난다고 했다. 거기에 점점 우러나며 국물을 매콤하게 하는 세라노 고추, 중간중간 씹히는 쫄깃한 오징어 조각들. 딱히 숙취가 없는 날이었지만, 피곤한 이 세상으로부터 속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아내는 처음에 각자의 그릇에 국물을 따르며, 둘이 다 못 먹을 만큼 양을 많이 했으니 남겨서 내일 먹자고 했다. 그러나 정신 차려 보니 콩나물도 국물도 전혀 남지 않았다. 우리는 말이 없이 한껏 불러와 출렁거리는 배를 만졌다. 맥주를 마시고 싶었으나, 너무나 과하게 배가 불러 맥주는커녕, 물도 마실 수 없었다. 숙취를 막는 정도가 아니라 과음도 막아주는, 콩나물 국밥은 역시나 알콜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자일지도 모르겠다.

 곧 저녁 시간이다. 이번 주도 '취미 생활'을 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밥을 먹고 장을 보러 가려고 한다. 아직 집에 콩나물이 남아 있지만, 아마 오늘도 그 커다란 5파운드짜리 콩나물 봉다리에는 한 번쯤 또 눈이 갈 것 같다. 아, 오늘은 오징어 젓갈도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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