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추억을 굽는다.
나의 어린 아침은 거의 항상 식빵과 함께 시작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가끔 모닝빵이나 크로와상 등도 먹긴 했지만, 내 관념 속에선 하루를 시작하며 먹는 빵이란 의미에서 이들도 '식빵'의 커다란 범주 안에 포함된 것 같다. 이제는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밥을 비롯한 한식의 맛을 알아가고 있으나 아주 예전부터 나는 밥보다는 파스타나 빵을 훨씬 더 좋아했다. 특히나 아침으로는 도저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우리 집에는 언제나 식빵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밥 대신 빵을 먹는 덕에 조금은 엄마의 일이 덜어졌을까 싶다가도, 생각해보면 엄마는 토스터기, 혹은 전자레인지에 빵을 데우는 일도 굳이 해 주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고, 나와 정반대로 빵을 잘 먹지 않는 아빠와 동생에겐 밥을 차려 주어야 했기에 결국 두 번 일을 해야 했다. 이 손 많이 가는 세 남자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엄마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지금이야 미국에서 혼자 살며 굳어진 습관 덕에 아내와 같이 브런치를 먹기로 한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아침 정도는 알아서 잘 챙겨 먹는다. 이에 아내가 늦게까지 잘 수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혹시나 애가 생긴다면 제 알아서 아침 찾아 먹는 방법은 가능한 한 빨리 알려주고 싶다.
아주 오랫동안 아침으로 밥보다 빵을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생 때 소풍을 갈 때면 그 당시 국룰이었던 김밥을 영 좋아하지 않았고, 엄마는 그런 나를 위해 식빵으로 샌드위치를 싸 주었다. 계란 햄 샌드위치였다. 계란을 보글보글 잘 삶아 마요네즈와 잘 섞어 으깨 식혀 샐러드 형태로 준비하고, 까탈스러운 나를 위해 식빵 네 면의 껍질을 썰어내어 주었다. 그래서 남은 식빵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정사각형의 모양을 띄고 있었다. 그 위에 마찬가지로 정사각형의 슬라이스 햄을 얹고, 마요네즈 계란 샐러드를 얹고, 빵으로 덮었다. 이 계란 햄 샌드위치는 폭신하고 보드라운 빵 사이 상큼하고 고소한 마요네즈와 계란, 짭짤한 햄이 너무나 잘 어우러져, 어린 시절 나의 최애 도시락 메뉴였다. 내가 조금 더 크고 나서는 그 위에 한 번 더 계란 샐러드를 한 겹 더 바르고, 빵 한 장을 더 얹고, 직각삼각형 두 개가 나오도록 사선으로 잘라 타파웨어나 비닐봉지에 담아 주곤 했다. 내가 소풍을 가건, 수련회를 가건, 수학여행을 가건 엄마는 그 안에 짤막한 편지를 써 주곤 했다. 한 번은 어쩌다 그 전날 밤 다툰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수련회장에 도착해 보니 샌드위치는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기다렸던 그의 편지는 찾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새벽 다섯 시 오십 분쯤 부엌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엄마의 일어나라는 소리에 아직 온몸에 잠을 묻힌 채로 방에서 나오려면 기가 막히게 토스터기에서 식빵이 통, 하고 올라왔다. 여름이면 시원하게 갈아둔 생 토마토 주스나 얼린 딸기 쉐이크, 겨울이면 살짝 맹맹한 코코아나 끓인 물을 부으면 바로 준비되는 <보노>의 콘수프와 함께 잘 구워진 빵 몇 조각이 접시에 놓여 있었다. 딸기 잼도 물론 좋아했지만, 시트러스 덕후인 나에겐 역시 오렌지 마멀레이드가 가장 맛있었다. 그 쌉쌀하고 새콤달콤한 맛, 묵직하게 아삭한 식감, 기분 좋게 잠이 깨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심부름을 잘 다녔던 나는 빵 담당이기도 했다. 오후 느지막히 저녁 즈음,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 높디높은 플라타너스 그늘이 드리운 인도를 십 분쯤 걸어가려면 동네 터줏대감 빵집, 파리바게트가 있었다. 제법 안전한 동네였지만, 내가 중학생 때엔 한동안 '일진' 고등학생 형들이 깽판을 치고 다녔다. 그러던 어떤 날, 하필이면 엄마 생일을 맞아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세뱃돈 5만 원쯤을 들고 빵도 사고 엄마 케이크와 선물도 살 겸 그 길을 걷고 있었는데, 무서워 보이는 형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나를 조금씩 저기 후미진 곳으로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담배 때문인지 싯누런 이빨에 지저분하고 긴, 그 당시 유행이었던 '샤기컷' 머리를 한 그에게 붙들려 공포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는 끌려갔다. 그러던 중 뒤에서 누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파리바게트에 가는 길가 트럭에서 과일을 파시던 아저씨였다. 항상은 아니지만, 여름이면 참외, 겨울이면 귤을 한 바가지씩 사 가곤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빵집을 갈 때마다 인사를 나누던 아저씨였다. 그는 과일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기 위해 덮어둔 차양막을 고정하는 쇠파이프를 빼어 들고 휘두르며 이 쪽으로 달려왔다. 그 비열한 새끼들은 내 목을 잡고 던져버렸고, 나는 바닥에 자빠져 내 가방에 들어있던 피아노 책이 구겨지지는 않았나 걱정이 되었다. 아저씨는 큰 일 안 나서 다행이라며, 참외 한 개를 내게 주셨다. 그 옆에 있던, 매 화요일마다 찾아오던 타코야키 트럭 아저씨는 가쓰오부시를 잔뜩 올린 타코야키 여섯 개를 상자를 담아 내게 주셨다. 그런 고마운 분들 덕분에 나는 진정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지만, 쿨하지 못한 나는 아직도 그 일진 새끼들이 엿같은 인생을 살고 있기를 바란다.
파리바게트에서 식빵을 고르는 것은 나름대로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아무래도 달달하고 부드러운 생크림 식빵이었고, 그게 없으면 모닝빵, 그것마저도 없으면 우유 식빵을 사 왔다. 그 파리바게트의 사장님과도 친했지만, 그분의 따님은 나에게 아주 친근하게 대해주어 나는 늘 그를 '빵집 누나'라고 불렀다. 생각해보니 그의 이름을 아직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파리바게트에 처음 가 마지막으론 들른 것은 대학교 3-4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할 때에도, 특목고에 진학했을 때에도, 내가 서울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에도, 유학을 가게 되었을 때에도, 여자 친구를 데리고 갔을 때에도 그는 친누나 마냥 축하해주었고, 코코아 한잔, 빙수 한 그릇, 생크림 케이크 하나씩 내 손에 들려주곤 했다. 스쳐진 수많은 인연들, 그 사람들은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이전에도 글을 쓴 적이 있듯, 나는 빵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굽는 것도 아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아주 원초적인 사워도우 빵을 굽는 것에 커다란 흥미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물론 디저트나 케이크도 정말 좋아하기에 새벽 대여섯 시가 되도록 마카롱을 백여 개씩 굽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는 물, 밀가루, 소금, 효모, 그 본질적인 조합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틈틈이 시간을 들이곤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빵을 좋아하는 것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았다. 그 또한 별의별 빵을 다 좋아했고, 그렇기에 그렇게 빵을 굽는 것에 열정이 있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이른 기억 안에서부터 그는 뭔가를 구워내었다. 계란 가득 섞인 도우 위 아몬드 슬라이스나 호두 한 조각, 혹은 초콜릿 칩 세, 네 개씩 올라간 계란 쿠키는 엄마의 시그니쳐였으며, 홈베이킹이라는 개념이나 유튜브는커녕 인터넷이나 오븐조차 보편적이지 않았던 시절, 잘 섞어 굽기만 하면 되도록 패키징 되어 마트에 판매되던 필스베리 브라우니 믹스나 크로와상, 비스킷 도우를 사다 구우면 주변 많은 사람들이 엄마의 빵과 과자를 좋아해 주었고, 나는 집 안에 뜨거운 오븐의 냄새가 나는 것이 정말 좋았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제법 묵직한 기계가 들어섰다. 바로 제빵기였다. 밀가루와 우유, 버터, 이스트를 넣으면 알아서 반죽도 하고, 발효도 시키고, 굽기까지 하는 그런 기계였다. 제빵기가 작동한 지 한 네 시간쯤 되면 보송보송한 식빵의 냄새가 집을 가득 채웠다. 빵이 다 구워졌다는 전자 알림음이 울리면 엄마는 두꺼운 오븐 장갑을 끼고 빵틀을 뒤집어 짙은 갈색으로 잘 구워진 식빵 덩이를 식힘망 위에 올려놓았다. 모락모락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식빵은 아무리 겉이 식었다고 해도 그 속은 여전히 어마어마하게 뜨거웠다. 어릴 적엔 식빵 껍질을 영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속만 그렇게 파 먹고, 엄마는 자기는 어차피 껍질이 맛있다며 남겨진 껍질을 먹었다. 나의 철없음에 부끄러워지면서도, 나이가 들어 빵 껍질의 맛을 알아버린 나이기에 한편으론 엄마가 정말 껍질을 좋아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본다.
그 이후론 내가 어디 멀리 갈 때면 엄마는 새벽에 딱 구워지게끔 제빵기를 세팅해놓곤 했다. 아직 어두운 새벽, 갓 구운 식빵의 냄새는 그에 견줄만한 것이 없었다. 모락모락 김이나는 식빵을 간신히 들어 밑면을 두드리면 '통통' 하는, 잘 구워졌음을 알려주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1박 2일, 2박 3일, 주로 별을 보러 갈 때면 엄마는 그 빵을 통째로 비닐봉지에 담아 주었고, 나는 내려가는 길 고속버스 안에서도, 도착해서도, 관측을 하다가 배고플 때에도, 조금씩 식빵을 뜯어먹었다. 항상 같이 별을 보러 갔던 나의 여자 친구도 맛있다며 그 식빵을 잘 뜯어먹었는데, 그 또한 유난히 껍질 부분을 좋아하곤 했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식빵을 먹을 일은 거의 없었다. 식빵의 기원이 미국이라는 것이 무색하게도 미국의 식빵(을 비롯한 거의 모든 빵과 과자, 케이크 등)은 정말로 놀랍게도 맛이 없었다. 보존제 때문에 나는 시큼한 맛이 기분 나빴고, 고소한 맛이나 부드러운 식감 대신 뻣뻣한, 자본주의적 무미건조함만이 존재했다. 물론 한인 마트에 가면 파리바게트가 있었지만, 거기까지 가서 빵을 살 시간이나 돈이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맛있는 베이글을 먹으면 먹었지, 더 이상 식빵을 먹을 일이 없어졌다.
내가 빵을 굽게 된 정확한 동기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가 빵을 굽던 기억과 더불어 나 자신이 보다 맛있는 빵을 먹고 싶었던 부분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없는 살림에 아주 적은 재료로만 구워내기 시작한 나의 빵은 식빵같이 버터가 들어간 빵들과는 다르게 훨씬 거칠고 단단해서 먹다 보면 늘 입술 양쪽 끝이나 입천장이 까져 있었다. 그러나 밀가루, 효모, 물, 소금, 이 아주 본질적인 재료들이 발효와 숙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맛있는 빵이 되고, 다양한 요소에 의해 맛과 질감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렇게 계속 딱딱한 빵을 고집하던 내가 처음으로 식빵을 굽게 된 것은 아내의 제안 덕분이었다. 아내는 한국에서 먹던 식빵을, 그리고 우리가 같이 고속버스 안에서 뜯어먹던 엄마의 식빵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밀가루로 풀을 쑤어 만든 탕종을 더해 더 오랫동안 촉촉하고 보드랍게 유지되는 것으로 유명해진 '탕종 식빵'을 구워보고 싶어 했다. 이제는 베이킹의 영역마저 아내에게 넘어간 지 오래지만, 식빵은 나도 한 번쯤은 구워보고 싶었기에 우리 집 첫 식빵은 내가 굽게 되었다. 소스팬에 휘휘 저어 졸여낸 밀가루 탕종을 넣어 반죽을 하고, 탐스럽게 부푼 반죽 세 덩이를 빵 틀에 담아 오븐에 넣으니 곧 고소한 버터의 향이 온 집안을 가득 채워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달궈지는 오븐의 냄새, 열기, 구워지는 빵의 향기, 이렇게 갓 구운 빵을 먹는 일은 나에게 있어 손에 꼽히는 행복이다. 내가 굽는 단단한 빵은 잔열에 마저 속이 익도록 한 번 완전히 식혔다가 먹어야 맛있지만, 식빵은 오븐에서 나오자마자 너무나 뜨거워 손으로 집기에도 힘든 상태일 때 먹는 것이 제 맛이다. 반질반질하고 노릇노릇하게 보드라운 갈색으로 구워진 덩어리들을 데이지 않게 요령껏 붙잡고 그 틈을 열면, 너무나 고소한 냄새가 새하얀 김과 함께 올라온다. 잘 구워진 폭신폭신한 빵의 속은 결대로 구름같이 찢어지고, 그것을 입에 넣으면 재빠르게 녹는다. 참 행복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즐겁고 맛있었지만, 식빵은 역시 나의 영역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탕종을 만들어서 빵을 굽는 일이 나에겐 '요리'의 영역으로 느껴졌고, 외골수인 나에겐 단순한 발효빵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식빵을 굽게 된 것은 바로 아내였다. 아내는 요리를 하고 나는 베이킹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제는 베이킹마저도 거의 다 아내가 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그저 발효빵과 리에쥬 와플을 굽는 정도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훌륭하게 반죽을 하여 퐁신퐁신한 식빵을 구워내기 시작하였다.
빵이란 존재는 그 자체로도 맛있지만, 맛있는 것을 발라 먹으면 더욱더 맛있다. 어릴 적엔 버터, 딸기잼, 마멀레이드만으로도 맛있게 먹었다. 베이킹을 시작한 후 아내의 시그니쳐 중 하나는 바로 레몬 제스트 딜 버터다. 이름 그대로 딜과 레몬 제스트를 섞어 아주 예쁜 비누처럼 굳어지는 버터는 빵에 닿아 천천히, 투명하게 녹아가며 아름답게 딜과 제스트를 빵 표면에 남긴다. 고소한 버터의 향에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더해지고, 이에 딜의 그 독특하고 강한 향이 어찌나 잘 어우러지는지. 여기에 달콤한 아몬드 버터나, 친구가 선물해준 밤 잼을 같이 발라 먹으면 국룰, 아니, 세계룰인 단짠단짠이 너무나 잘 어우러져 잔뜩 신이 나게 된다.
사실 우리에게 '탕종' 식빵을 굽는 데엔 큰 의미가 없다. 오랫동안 촉촉하게 유지될 수 있는 데 의의가 있는 탕종 식빵인데, 거의 항상 굽자마자 다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탕종 식빵이 진가를 발휘를 할 때가 왔으니, 바로 조슈아 트리로 클라이밍 캠핑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떠나기 전날 밤 구워, 이튿날 오후에 출발하여 그 다음날 아침 -- 굽고 나서 이틀이 된 아침 -- 에 먹을 계획이었다. 큰 덩이 하나, 작은 덩이 하나를 구워 작은 녀석은 역시나 굽자마자 먹어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아내가 특별한 잼도 준비했으니, 바로 얼그레이 밀크 잼이었다. 우유에 오랫동안 얼그레이 티백을 담가 냉침한 뒤, 이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졸여 만든 잼이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식빵에 아주 은은한 달콤함과 얼그레이 버가못의 섬세한 상큼함, 그리고 홍차 특유의 향과 씁쓸함이 어마어마하게 잘 어울렸다. 아내의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만, 얼그레이 밀크 잼은 정말 사업 아이템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뜨거운 날씨에 해가 지고 나서야 클라이밍을 시작하여 늦게까지 깨어있던 여름밤, 그리고 새벽부터 뜨거운 햇빛에 일찍 잠에서 깬 아침, 그 식빵을 맨 빵 그대로 먹어보니 탕종의 위력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식어 있었지만, 여전히 처음 구웠을 때처럼 부드럽고 촉촉했다. 아내는 조금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이를 토스팅 하기 시작했고, 아내의 아웃도어 친구는 나와 비슷한 텐션으로 이 식빵은 좀 더 좋은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뿌듯했다. 아내는 멋쩍은 건지, 귀찮은 건지 늘 내가 그의 음식 사진을 찍으려 할 때면 뭘 그렇게까지 하냐며 촬영에 협조하지 않는데, 그의 친구는 나의 그 비전에 잘 공감해주곤 해서 반갑다.
아내가 열심히 빵을 굽는 동안 아내의 친구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굳이 조슈아 트리를 찾아 떠났다. 내 안의 흥이 한껏 터져, 나도 그를 따라갔다.
아내의 조슈아트리 베이커리 식빵.
메타적인 사진. 아내의 음식에 나만큼 신나 해줄 친구를 알게 된 것은 제법 뿌듯한 일이다.
그동안 아내는 묵묵히 식빵을 토스팅 해서, 그 맛있는 얼그레이 밀크 잼을 발라 주었다. 식빵도 식빵이지만 그 잼은 역시나 어마어마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한 입마다 식빵에 발라 먹었다.
베프가 된 아내와 그의 친구는 산에도, 바다에도, 사막에도 함께한다. 이 멀고 먼 타지에서 아내가 그런 인연을 얻게 되어서 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부디 이 둘이 오래 시간과 공간, 삶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미국에 자리 잡게 된 것은 학업에 관련된 부분도 있지만, 내가 자유로워지고 싶은 부분이 더욱더 크다. 나는 나의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고자, 아니, 도망치고자 했다. 대단히 힘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드라마틱하지 않기에 더욱더 질척이며 끊을 수 없는 미묘한 굴레는 나를 아주 긴 시간에 거쳐 지치게 했다. 나는 나의 어린 과거를 잊고 싶었고, 실제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 늘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진 삶은 나로 하여금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내의 많은 요리가 그렇듯, 그의 베이킹도 그의 추억을 다시 따뜻하게 구워내는 일이다. 맘모스빵, 꽈배기, 찹쌀 도너츠, 찹쌀 모찌, 모카번, 그리고 식빵, 이는 우리가 같이 가지고 있는, 혹은 따로 가지고 있지만 나눌 수 있는 과거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아내의 식빵은 내가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있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던 나와 나의 부모님의 따뜻한 기억을 조금씩 되새기게 한다. 그렇게 그를 통해 예전엔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모습을, 내가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어간다. 그들도 나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내는 나를 그렇게 치유해준다. 그는 언제나 내 안에 담겨 있는 많은 어둠, 슬픔, 불안을 다독여준다. 그 자신에게도 많은 힘듦이 존재함에도 말이다. 굉장히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나의 어떤 부분들이 내 목 뒤 타투로 새긴 단단한 나무처럼 그에게도 위로가 되길 바란다. 오늘도, 내일도 나와 아내는 갓 구워진 따스한 빵 냄새를 그리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