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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는 왜 캣대디 집으로 왔을까

by 이용한

오랜만에 이웃마을 캣대디에게 사료후원을 하러 들렀다. 약 두 달 만이다. 수술 상태가 안좋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캣대디는 그 성치 않은 몸으로 오늘도 일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예상했듯 고양이 사료는 진즉에 떨어진 듯했다. 나 또한 요즘엔 형편이 빠듯해 후원사료는 언제나 부족했고, 그 때마다 캣대디는 개사료를 섞거나 남은 밥에 사료를 섞어 먹이곤 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는데, 집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나타나자 어디선가 고양이들이 낌새를 채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사료 냄새가 났던 모양이다. 나는 이곳 주인장을 대신해 사료 포대를 뜯어 세 개의 프라이팬 그릇에 그득하게 사료를 채워주웠다. 네댓 마리 고양이가 그릇을 따로 차지하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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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뒤란 쪽에서 스윽 마당에 모습을 나타낸 녀석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너구리였다. 이 녀석도 고양이처럼 뭔가 낌새를 채고 나타난 걸까? 마당에 들어선 너구리는 넉살 좋게 마당을 한바퀴 휘 돌았다. 그러더니 기어이 사진을 찍고 있는 내 앞 1미터 정도까지 다가와 코를 킁킁거렸다. 하필이면 고양이들이 밥을 먹고 있는데, 녀석은 밥그릇 2~3미터 앞 빨래 장대 앞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앉아 있는 모습이 그런 것 같았다. 너구리가 너무 가까이 와 있는 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밥을 먹던 네 마리 중 세 마리 고양이가 슬슬 꽁무니를 빼더니 대문 앞에 가 앉았다. 때는 이 때다 싶어 너구리는 그릇 하나를 차지하고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삼색이만 너구리를 예의주시하며 옆에서 밥을 먹었다. 고양이와 너구리가 그릇 하나씩을 차지하고 밥을 먹는다. 외국의 동영상에서나 보았을 풍경이 한국의 한 시골마당에서 펼쳐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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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는 그렇게 사료그릇에 머리를 쳐박고 한참이나 밥먹는 데 집중했다. 마주보고 밥을 먹던 삼색이는 어느덧 배를 다 채웠는지, 대문 쪽으로 걸어나왔다. 그러자 너구리가 삼색이가 먹던 자리를 냉큼 차지해버렸다. 구석이라 은신하기에 훨씬 좋았다고 느낀 모양이다. 너구리가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마당에 식빵자세로 앉아 있던 회색고양이가 이번에는 너구리와 마주보고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역시 회색 고양이가 다 먹을 때까지도 너구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의 프라이팬에 담긴 사료를 다 비워낼 작정인가 보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급식소에 와서 사료 먹는 모습을 보면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닌 듯했다. 다른 고양이들은 여전히 대문에 나앉아 너구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나란히 밥을 먹던 삼색이와 회색이를 뺀 이 그룹은 아직 너구리를 무서워하고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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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작년 겨울 우리집에도 두 마리의 너구리가 나타나 사료를 먹고 가곤 했었다. 당시 너구리는 겨울인데도 털이 온통 빠져 있었고(피부병에 걸린 듯) 어딘지 모르게 아파보였다. 언젠가 전원주택 할머니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자기 집에도 두 마리 너구리가 나타나 밥을 먹다 가곤 했단다. 그러면 동화같은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어느 날 보니까. 장독대에 쫄로라미 다섯 마리 고양이가 앉아서 졸고 있더라구. 아이구 이 녀석들 하면서 바라보는데, 맨 마지막에 있는 녀석이 못보던 녀석이더라구. 그래, 내가 넌 누구니? 물었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너구리더라구.” 고양이와 나란히 잠을 자던 너구리 이야기. 내가 어디 가서 이 얘기를 꺼냈더나 다들 ‘뻥’치지 말라고 믿지 않았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었다. 전원 할머니에 따르면 털이 하나도 없던 너구리가 봄이 되자 통통해지면서 털이 나왔다고 한다. 내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난 이 두 마리 너구리가 우리집에서 밥을 먹던 어미와 새끼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우리집에서 그곳을 가자면 커다란 산을 하나 넘어가야 하지만, 산이 영역인 녀석들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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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너구리는 그 새 거짓말처럼 프라이팬 하나를 다 비워냈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내가 마당에서 찰칵거리며 사진을 찍는 동안 뒷산에 갔던 집주인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머니는 너구리를 보더니 태연하게 “쟤 또 왔네.” 그런다. “여기 자주 오는 애인가요?” “몰라 저번 주에 보니까 고양이 틈에서 밥을 먹더라고.” 캣대디가 오지 않아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급식소의 단골손님일 가능성이 높았다. 할머니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너구리도 밥그릇을 벗어나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 나온 너구리는 느닷없이 회색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영문도 모른 채 회색이는 ‘하악’을 날렸다. 보아하니 너구리는 자주 회색고양이에게 다가섰고, 회색이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밥 먹는 건 맘대로 해도, 가까이 오는 건 안 된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너구리는 식빵을 굽는 회색이와 불과 2미터 안팎에 주저앉아 동정을 살폈다. 대문에서 기다리던 고양이는 ‘다 먹었는데 왜 안가느냐’면서 너구리를 향해 시위를 했다. 그래도 너구리와 고양이의 사이가 이 정도면 양호한 것이다. 고양이로서는 가뜩이나 사료가 모자라 툭하면 굶어야 하는 급식소에서 자기 밥그릇을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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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니 너구리는 털갈이를 하고 있었다. 야생의 삶이 척박해서인지 썩 건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 녀석은 산에 더 이상 먹을 게 없어서 여기까지 내려왔거나 영역싸움에서 밀려나 이곳까지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요즘 우리 동네는 가는 곳마다 도로공사를 한다고 산이 파헤쳐지고, 등산객들은 구름떼처럼 몰려와 나물이며 도토리, 밤을 주워가곤 한다. 야생동물이 살기에는 최악의 환경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고양이와 공존하는 것도 어렵지만, 야생동물과 공존하는 건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반면에 고양이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넘겨주면서까지 너구리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택했다. 고양이들이 집단행동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폭력적인 방법은 인간의 방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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