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여행_5일차
마지막 날이 밝았다. 여행이 끝나가는 내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마지막날은 비가 내렸다. 우중충한 하늘 따라 기분도 가라앉았지만 4박 5일 동안 맑고, 흐리고, 비까지 내리는 모든 현상을 경험했다는 데에 그런대로 의의가 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의미야 부여하기 나름이니까. 비 내리는 오사카도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날은 여유롭게 보내기로 했다. 오전에 호텔 체크아웃 하고 로비에 짐을 맡겨둔 뒤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늦은 오후 출국이긴 해도 멀리 이동하기엔 심적으로 부담이 있었다. 여유롭게 공항으로 이동할 시간까지 계산해서 못다 한 구경도 할 겸 도톤보리 인근을 더 즐기기로 했다. 그나마 짐을 맡길 수 있어 두 손은 가벼웠지만 깜박하고 배낭을 잊는 바람에 어깨는 내내 무겁게 돌아다녀야 했다. 이것저것 때려 넣어 바윗덩어리 같은 가방을 이고 지고 다녀야 하다니. 정신이 없긴 했나 보다. 깨달았을 땐 이미 호텔에서 한참 멀어진 뒤라 돌아가기도 애매했다.
여행 중 여러 차례 방문했던 ‘이치비리안’ 기념품 상점. 동생과 친구에게 줄 선물을 구매할 겸 마지막날 또 들렀다. 언제 가도 상냥한 직원의 미소에 마지막까지도 기분이 좋았더랬다.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글리코상 앞을 지나쳤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생경한데 벌써 떠나야 한다니.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안겨주던 이 구조물과도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 어쩐지 안타까웠다. 머지않아 곧 다시 만나길 바라며, 그땐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이길 바라며 혼자만의 조용한 작별을 나눴다.
마지막 만찬을 위해 ‘고기극장’을 찾았다. 딱히 노린 건 아니었으나 오픈 20분 전 도착했다. 도착 직후엔 내 앞으로 한 팀이 대기 중이었다. 규모가 작은 가게라 달리 대기 라인이 없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 옆에 바짝 붙어있기 민망해서 메뉴판 보는 척 살짝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그새 줄이 생겼다. 졸지에 4번째로 순서가 밀려버렸지만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오픈이 임박하자 줄이 끝도 없이 길어졌다.
주문은 키오스크 방식이었다. ‘치맛살 스테이크 덮밥’이 유명하다기에 메뉴 선택에 고민은 없었는데 키오스크 화면이 복잡해서 살짝 헤맸다. 뒤에서 대기하던 젊은 부부가 그런 내 모습을 알아차리고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었다. 덕분에 원하는 메뉴를 무사히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갈하게 담긴 1인 정식이 등장했다. 먹음직스럽게 얹힌 치맛살 스테이크가 침샘을 자극했다. 훌륭한 비주얼만큼이나 맛도 좋았다. 은근하게 밴 불 향이 감칠맛을 돋웠고 식감도 부드러웠다. 함께 나온 숙주도 간이 적당했다. 다만, 밥은 조금 남겼다. 고기에 비해 밥이 많은 편이었다.
식사 후 신사이바시 거리 쪽으로 이동했다. 지붕이 설치되어 있어 비 오는 날에도 돌아다니기 수월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전날 들렀던 건너편 2층 드럭스토어를 올려다보았다. 유행하던 복숭아 맛 곤약젤리를 구하려고 온갖 드럭스토어는 다 뒤지고 다니다가 겨우 구한 곳이었다. 웬만한 곳은 죄다 품절이라서 반복되는 허탈함 끝에 마주한 오아시스 같은 그런 곳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언제 규정이 바뀐 건지 컵에 담긴 곤약젤리는 질식사 위험이 있어 국내 반입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통관이 되지 않으면 전부 폐기해야 한다는데 그럼 돈이 너무 아깝지 않나. 구매 당시 반품이 안 된다고 했던 것 같아 상당히 난처했는데 빠듯한 살림에 주변 선물한답시고 넉넉하게 샀던 거라 혼자 해치우기엔 양도 많고 여러모로 낭비였다. 결국 다음 날 다시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피차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예외 환불을 인정해 주었다. 한국인 직원이 있어 소통이 수월했던 기억이 난다. 사정을 헤아려 준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가 다 먹어 치워야 하는 상황은 면했다. 만일 환불하지 못했다면 이 무슨 눈물 젖은 복숭아 젤리란 말인가. 별안간 해프닝이었지만 무사히 해결되어 다행이었던 곳이라 나도 모르게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우연히 디즈니 스토어를 발견했다. 입구 전면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릭터 인형과 소품이 놓여있었다. 앨리스 인형은 실물보다 조금 아쉬운 구석이 있었다만 시계 토끼 인형은 한눈에 봐도 굉장히 귀여웠다. 작중에서 나온 그림체보다 훨씬 매력적인 생김새였다. 일단 더 좋은 것들이 있을지 모르니 더 둘러보기로 하고 매장으로 들어섰다. 각종 디즈니 캐릭터를 기반으로 제작된 상품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구석구석 구경하는데 기분 탓인지 몰라도 앨리스 관련 상품이 타제품에 비해 퀄리티가 월등해 보였다. 비록 비싸서 눈요기만 하고 나왔지만. 시계 토끼 인형을 구매할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으나 결국 빈약한 지갑 사정에 K.O. 하고 말았다. 당시 프리랜서였던 나는 당장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다음 달 수입이 없는 상황이었고, 보통 막내 작가의 경우 경력을 쌓기 위해 텀 없이 바로 다음 프로그램으로 넘어가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생각보다 성향과 맞지 않은 방송 업계에 염증을 느낀 나는 잠시 쉬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니 미래의 나에게 부담을 지우기도 어려운 형편이었고, 수중에 남은 엔화는 면세점에서 로이스 초콜릿을 구매할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에 돌아가 생활해야 할 돈에서 끌어다 쓸까 싶기도 했지만 고작 인형 하나에 욕심을 부리는 것 같아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결국 눈에 밟혀서 귀국 몇 개월 후 구매대행으로 기어이 손에 넣고 말았지만 말이다.)
등짝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이 갈수록 짙어지고 여행인지 고행인지 점차 헷갈리기 시작할 때쯤 슬슬 공항으로 넘어가기 위해 맡겨둔 짐을 찾으러 호텔로 향했다. 가는 순간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고 종일 흐렸다. 만약 화창한 날이었다면 헤어지기 더 힘들었을까. 이토록 흐린 얼굴의 오사카라도 헤어짐은 아쉬웠다. 나의 첫 여행이 이렇게 막을 내린다니. 어찌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 시간이 멈추거나 날짜가 며칠 전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하는 허무맹랑한 바람이 들 정도였다. 두 달 전 항공권을 끊어두고 출국 날만 바라보고 살 때는 오지 않을 날 같더니 막상 도래한 이후로는 시곗바늘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하루하루가 재빠르게 달아났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 했던가. 잔인할 만큼 판이한 전후 흐름이었다. 이방인으로서 허락된 낯선 세상에서의 시간이 조금씩 0에 수렴하고 있었다.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유니버설의 출입구가 그랬듯 돌아가는 열차 너머 풍경 또한 올 때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뒷자리에 들려오는 “아쉽다. 그냥 괜히 다 아쉽다”라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거렸다. 이심전심이었다. 다음을 기약하기 힘들다는 걸 알아서 그랬을까 유난히도 사무치게 아쉬운 풍경을 뒤로하고 공항에 도착했다. 빠르게 면세점에 들른 뒤 비행기에 올랐다. 딱 해 질 녘이었다. 구름 위에서 노을을 보려나 기대했는데 애석하게도 내 자리는 동쪽이었다. 끄트머리 태양빛이 겨우 보였다. 감질나는 구경이었다. 반대편에서는 석양이 환상적으로 저물고 있는데 난 그 반대편에서 그 찬란함을 아쉬워해야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지만 처음이라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첫 여행. 계획대로 완벽하길 바라는 마음이 욕심이란 것쯤은 충분히 아는 나이였지만 그래도 나의 여행은 빈틈없이 행복하기만 바랐다. 그런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작부터 대차게 꼬여버렸지만 말이다. 덩달아 마음도 어깃장이 나서 잠시 동굴에 들어갔다 나오긴 했으나 행복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 그 행복을 놓치지 않고 음미할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애달프지 않았을 텐데. 힘이 센 감정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기 바빴던 순간들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러나 처음이라 불안하고 혼자라서 위태로웠을지언정 종국엔 스스로 해냈다. 그런 내가 기특했다. 만지면 오돌토돌한 촉감이 있는 시간 속에서도 단언컨대 행복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여정 아닐까. 비행기는 갓 태어난 별 하나가 반짝이는 밤하늘을 지나 한국으로 향했다.
4박 5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한국은 순식간에 적응되었다. 공항철도 창밖으로 단번에 읽히는 간판이 새삼스러웠다. 종전까지만 해도 영어가 아니면 무엇도 읽지 못하는 타국의 길거리를 거닐고 있었는데 방금까지도 여기 있었던 사람처럼 모든 감각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