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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 내가 그곳에서 배운 건 ‘외로움’이었다.

외로움과의 공생

by 잎새 달 이레

나의 첫 여행은 물리적 의미의 ‘혼자’가 아닌 심정적 의미의 ‘혼자’를 절실히 깨닫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나 쉬이 단언하지 못했던 그 감정의 이름이 바로 ‘외로움’이었음을, 내가 이다지도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던 감정의 생김새가 이런 모양이었음을 나는 모든 것이 낯선 세상에 가서야 명징하게 깨달았다. 외면하고, 의심했던 그 감정에 나는 유난히도 취약한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글의 초기 목적은 나의 지난 여행기를 토대로 내가 외로움을 각성하게 된 과정과 그로부터 어떻게 공생하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의문을 펼쳐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의로 내던져진 낯선 세상에서 깨달은 감정에 대해서 논하려 했는데, 가만 보니 이건 단순한 감정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홀로서기를 알리는 대장정의 서막이었다. 일종의 걸음마를 떼는 그런 이야기.


외로움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를 검색하려고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외로움’을 입력했다. 자동완성 검색어 명단에는 100% 일치하는 ‘외로움’보다 ‘외로움 극복’이 더 상위에 표시됐다. ‘괴로움’, ‘서러움’, ‘안타까움’ 등 비슷한 낱말을 몇 가지 더 입력해 보았다. 모두 내가 작성한 낱말이 가장 상위에 표시되었다.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것일까. 아니면 외로움을 극복했으면 하는 마음들이 절실한 것일까.


그러나 결국 삶은 외로움과의 공생이었다. 외로움은 소멸하지도 해소되지도 않고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내 곁에 머물다 어느 순간 어떤 사건으로 불시에 찾아오거나 마음이 연약해지는 틈을 타 기습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때때로 외로워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저앉아 우는 게 최선은 아닐 테니 현명하게 함께 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든 적든 아예 없든 유발되는 감정이 외로움이더라. 내 안에서 기인하기도 하고, 불현듯 불어오기도 하는 참으로 까다롭고 속상한 마음. 무색무취에 형체조차 없으면서 높은 밀도로 나를 괴롭히는 이 감각을 정화해야 하는 종착지는 결국 내 마음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나는 나를 건사할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여행지에서 나는 새로움을 반드시 공유하고 교감해야만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집스럽게 굳어진 생각은 결국 집착을 낳았고, 잘못된 생각은 엄한 데로 가지를 뻗어 덩굴 속으로 내 설렘을 집어삼켰다. 사진 또한 그럴듯한 기록 거리가 남아야 의미가 담긴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래야 가치가 생길 수도 있다.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고 자극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나의 여행기도 대부분 사진에 의해서 기억된 것이라 기록에 대한 집착을 모두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여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빠르게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부족했다. 욕심과 미련이 이토록 많은 사람이라는 걸 살다 보니 알게 됐다. 그 시절의 나는 ‘나’란 존재에 대한 탐구와 사유를 해내기엔 너무 미숙했고, ‘나’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배가 고프면 제법 울적해지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땐 미처 몰랐다. 공복에 예민해지는 건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혼자 밥 먹는 게 신경 쓰인다는 이유로 굶는 걸 예사로 알고 다녔더니 대략 3시 정도 되면 급격히 울적해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작은 자극에도 부정적인 감정은 빠르게 자라났다.


처음에는 혼자인 것이 서러워 이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난 그때 외로웠던 것이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꾸만 나와 연결된 가까운 타인을 찾아 헤맸다. 어쩌면 은각사에서도 나는 동생을 위하는 동시에 날 위했을지도 모른다. 내 외로움의 허기가 가서 매달릴 수 있는 가장 가깝고 친밀한 대상인 동생에게, 내 삶에 가장 친한 친구인 동생에게 나의 욕심을 동생을 향한 선심으로 치환해 집착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사진 욕심’과 ‘리액션의 부재’가 만들어낸 공허함도 있겠으나 기저에 깔린 내 편협한 사고가 날 더 외롭게 만들었다. 여행이란 대체로 어떤 '집단'이나 ‘일행’과 함께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라 여겼던 나는 당장 내 앞의 행복보다 함께 하지 못한 실망을 더 크게 받아들였다. 좌절에서 파생된 감정이 외로움인 줄도 모르고 그저 일행이 없는 상황만을 탓했다. 그래, 나는 나와 노는 법을 몰랐다.


그래도 외로움에 기울어지는 마음이 가닿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내가 실시간으로 보내는 메시지에 같이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는 친구의 말이 그땐 그저 고맙게만 들렸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어쩌면 그 친구는 딱히 실감 나지도 않는 환경에서 일방적으로 보내오는 일련의 소식에 의식적으로 반응하며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을 감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에 따른 일방적인 의지는 안락한 동시에 위태로운 구석이 있었다.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가 운 좋게 근처에 세워진 콘크리트 벽에 닿았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버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쉽게 쓰러져 버리고 말 테니까. 외로운 순간마다 찾는 관계는 건강하지 못하고, 외로울 때마다 타인에게 기대는 일 또한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서 확인하는 나와 그로부터 채워지는 만족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경우 일단 긍정적인 사고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대체로 부정적인 편이라 무언가 이루었음에도 이루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잦았다. 예민한 성정을 타고난 탓에 스트레스 자극의 역치도 낮아서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반응하기 일쑤였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가진 것보다 왜 늘 갖지 못한 것이 더 크게 보이는지. ‘아쉽지만 좋았다’와 ‘좋지만 아쉽다’는 한 끗 차이인 것을, 시선만 반대로 바꾸면 되는 일인데 그게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를 일이었다. 최고가 아닌 최선에 집중하는 긍정적인 시각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돌려 생각해 보니 결국 혼자인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혼자라도 해외여행을 왔다는 점, 혼자 먹었어도 음식은 맛있었다는 점, 혼자였지만 좋은 구경을 했다는 점, 추억할 수 있는 사진을 남겼다는 점, 민망함을 무릅쓰고 용기 냈다는 점 등 나는 해낸 일이 이다지도 많았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다 보면 더 좋아지는 방향으로 길이 났다. 그리고 조금씩 내가 보였다. 무엇이 아쉽고 불편한지.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사진이 찍고 싶으면 민망함을 이겨내고 씩씩해져야 했으며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수줍은 나를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용기도 없고 인정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는 차치하고 그저 혼자라는 사실만을 나무라고 있었다. 그건 나를 위하는 일도, 지키는 길도 아니었다. 이 여행으로서 ‘외로움’이 어떤 자극을 주는지 알았고 그때마다 내 반응이 어떤지 알았으므로 앞으로 나는 스스로와 합의하는 과정을 찾아가야 했다.


김소연 시인의 칼럼 <‘혼자’를 누리는 일>에서는 내가 나와 상의하는 일을 통해 나의 소소한 마음과 소소한 육체의 욕망을 독대하고 돌보는 일은 비록 외롭지만 오랜 세월 매만진 돌멩이처럼 그런 외로움에서는 윤기가 돈다고 말한다. 누군가와 연결을 통해서 겨우 안심하는 행동은 그저 사람을 소비하고 사랑을 속이고 나를 마모시키는 일뿐이라고. 다양한 감정이 지난 뒤에야 깨달은 그녀의 일련의 고백들이 내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 외로워지고 나서야, 그렇게 텅 비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 앞에서 주저앉아 울는 사람보다 씩씩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6년이 흘렀다. 그동안 사소한 경험치와 미약한 깨달음이 쌓였다. 만약 다시 혼자 여행을 떠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태어나 처음으로 해외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서 하루하루가 새롭고 신선했던 그 시절의 나와 어떤 차이가 날까. 물론 지금도 가 본 데가 많지 않아 비슷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여행은 일종의 탐험이라는데 난 이 여행을 통해 몰랐던 나에게로 다녀왔다. 처음 만난 도시, 처음 만난 풍경,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났다. 여행 내내 들은 노래가 하나 있다. 오마이걸의 <비밀정원>이라는 곡이다. 그맘때 발매된 신곡이었는데 마침 취향에 맞아 줄곧 반복했었다. 하나에 꽂히면 집요하게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 여행 내내 한 곡 반복으로 이 노래만 들었다. 호텔에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듣고, 거리를 걷는 동안 심심함을 채우고 위해 듣고, 그냥 듣고 싶어서 들었다. 그땐 으레 이동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때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일종의 ‘행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노래는 나를 향해 끊임없이 외치는 응원이 아니었나 싶었다. 몽환적인 멜로디와 여린 음색 사이에 담긴 씩씩한 노랫말의 의미를 내 삶에 포개어보니 그제야 퍼즐이 맞아떨어졌다. 난생처음 넘어가는 국경 위에서, 그 새로운 상공에서 나는 나만의 비밀정원에 무언가 심고 온 것이다. 말마따나 아직은 별거 아닌 풍경이라 미처 몰랐지만 내 안에 나만 아는 소중한 장소에 심어둔 멋지고 놀라운 것이 비로소 피어나 나의 성장을 도왔을는지도 모를 일. 그 씨앗 같았던 나날에 흘린 눈물을 먹고 조금은 성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몰랐고 지금은 아는 것이 이다지도 많은 걸 보면 과연 나의 비밀정원은 얼마나 무성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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