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여행_4일차(3)
다시 돌아온 해리포터 존에서 두 번째 어트랙션 ‘히포그리프’를 탔다. 사실 롤러코스터 종류라서 내키지 않았으나 해그리드 오두막을 가까이서 구경하려면 어트랙션 대기 줄을 지나쳐야 하길래 어쩔 수 없이 입장했다. 어느새 비스듬하게 내려앉은 햇살 덕분에 해그리드 오두막은 한층 더 진짜처럼 보였고, 당장이라도 거대한 덩치의 사냥꾼이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어트랙션 하차 후 무심코 성 근처를 지나다가 ‘포비든 저니’ 대기 시간이 40분으로 짧은 걸 발견했다. 기회다 싶어 얼른 재입장했다.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 지지부진 이동했던 처음과 달리 이번엔 여유로웠다. 한갓진 골목길을 걷듯 숲길도 걷고, 온실도 찬찬히 둘러보며 성 내부까지 단숨에 진입했다. 덕분에 정신없이 구경했던 내부도 편안하게 다시 둘러보았다. 아까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펜시브'가 보였다. 덤블도어 교장실에 있는 '펜시브'는 물 위에 특정 기억을 뿌린 뒤 얼굴을 담그면 그때 그 순간으로 잠깐이나마 다녀올 수 있는 마법 도구이다. 내가 만약 저걸 이용한다면 나는 어떤 기억을 꺼내고 싶을까,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이 그때 중 하나가 될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해가 저물자 주변에 하나둘 등불이 켜졌다. 호그스미드 상점에서도 아늑한 불빛이 새어 나와 노을 진 하늘과 함께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난로를 켜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풍경에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꼈다. 하룻밤 묵고 싶은 만큼 정다운 풍경이었다.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는 호그와트 성을 배경으로 한 ‘윈터 캐슬 쇼’가 펼쳐졌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불빛을 기반으로 영화 OST에 맞춰 영화 <해리포터> 속 상징적인 장면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이 주를 이루는 레이저 쇼였다.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불빛의 향연. 점점 고조되는 음악과 혼연일체 된 불빛이 만들어내는 시너지에 순간 넋을 잃었다.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색색의 불빛이 성을 휘감아 올라가더니 폭죽처럼 터지고 꽃잎처럼 흐드러져 내렸다. 그 순간에 느꼈던 마음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실시간으로 벅차오르던 마음이 함께 터져버린 듯한 황홀한 기분이었다. 5분 남짓한 쇼는 긴 여운을 남겼다.
레이저 쇼는 초회 공연 후 폐장 시간까지 반복됐다.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절기라서 평소보다 더 빠르게 퇴장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찌나 안타깝던지. 다른 계절이었으면 더 오래 머물렀을 텐데 왠지 손해를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서러워할 새가 없었다. 보고 있어도 그리워지는 풍경을 행여나 잊을세라 하염없이 바라봤다. 나가는 길에도 몇 번을 뒤돌아봤는지 모른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어렵사리 떼어내며 작별했다.
겨우 해리포터 존을 빠져나와 출구로 향하는 길. 호수 너머로 화려한 야경이 보였다. 낮 동안 꺼져있던 할리우드 존의 LED 간판이 만들어낸 불빛들이리라. 이 반짝이는 곳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아 자꾸만 뒤로 걸었다. 들어올 땐 그토록 설레던 길이 나갈 땐 왜 그리 애석하기만 하던지. 출구로 향하는 길이 꿈에서 깨어나는 터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멈출 수 없는 발걸음이라 부디 이 순간의 모든 감각이 영원토록 희미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며 걸었다.
대장정의 마무리로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상징인 지구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UNIVERSAL' 문구가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을 포착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적절한 위치와 타이밍을 위해 이 순간 이 자리에 모인 세계인은 한마음 한뜻이었다. 나를 찍어주는 사람들도, 내가 찍어줬던 사람들도, 내 사진 속 배경을 장식한 모든 사람들이 적절한 그 '순간'을 위해 공동의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여행에서의 모든 하루가 소중하겠지만 이날은 특히 더 매 순간이 아까웠다. 끼니라곤 쥬라기 월드에서 사 먹은 ‘터키 레그’가 유일했지만 배고픈 줄도 모르고 다녔다. 허기짐을 느낄 새도 없이 행복으로 가득 찬 하루였기에 가능했을지 모를 일. 동생과의 영상 통화가 불발되었을 때를 제외하곤 온종일 행복에 겨웠다. 정말 기쁜 순간 내 모습은 이런 모습이구나 싶어 나조차 놀랐던 날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해리포터 존은 대체로 출입에 제한을 둔단다. 워낙 인기가 많은 곳이라 인파가 몰리는 것을 대비하고자 확약권(시간 지정권)을 발행해 입장 횟수 및 시간을 제한한다고 했다. 그러나 난 이 사실 자체를 몰랐었고, 당시엔 사람이 적은 날이라 그랬는지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았다. 덕분에 별장 드나들듯 원할 때마다 실컷 오갔다. 일부러 혼잡도가 낮은 날을 골라 간 보람이 있었다. 몰랐던 행운 덕에 아낌없이 행복할 수 있었다.
호텔에 돌아와 사 온 굿즈를 펼쳐보았다. 이것저것 많이 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개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욕심만큼 따라주지 않는 주머니 사정에 놓고 온 것도 있었지만 마침내 손에 쥐게 된 것들이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오늘 하루가 차곡차곡 포개어져 있었다. 오랜 갈망 끝에 드디어 쟁취하게 된 나만의 것들이 미치도록 소중한 밤이었다. 헤르미온느가 시간을 돌릴 때 사용했던 '타임터너'가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오늘의 행복을 또 한 번 음미하고 싶었다. 터무니없는 상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날이었다. 꿈같았던 하루가 끝을 보이며 어느덧 여행도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