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어느 날의 기록
습관적인 공감을 그만두기로 했다.
스스로 공감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 자부하며 살아왔다. 물론 평균보다 공감 능력이 높은 것은 맞다. 그러나 지난날을 돌아보면 진심으로 공감되지 않으면서도 순간의 평화를 위해 공감하는 척을 했다. 행여나 상대가 무안해질까 봐, 내가 분위기를 망칠까 봐 등의 이유로 완전히 납득되지 않은 사연 앞에서도 반사적으로 상대 편을 들었다. 그게 상대를 위한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 상대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원하는 분위기를 기어이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원래가 그런 사람이면 속이 이렇게 시끄럽지 않았겠지. 진짜 내 생각은 다르지만 네가 원하는 대답이 이거라면 난 애쓰지 않고 그 말을 해줄 수가 있어,라는 마인드가 기저에 깔린 사람이라면 현장을 벗어난 뒤 상황 종료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습관적 공감을 열정적으로 퍼붓고 난 뒤 상황이 종료됐을 땐 왠지 모를 찝찝함이 무거운 바윗덩이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과연 이것은 선의의 거짓말에 해당할까, 아니면 그저 내가 위선자일 뿐인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솔직한 심정을 그 앞에서 펼칠 용기는 없었다. 말했듯이 나로 인해 분위기가 전환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행동도 내 이기심에 의한 작용일지도 모른다.
설령 사연에 대한 내 진심을 어느 정도 정제해서 전달한다고 해도 그 내용을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끔 전달할 자신이 없다. 심적으로 여유가 모자라 공감이 힘들거나 정말 상대가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진심이 툭 튀어나오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꼭 무엇이라도 된 듯 가르치는 말투를 쓰고 있었다. 마치 내 생각이 정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론을 설파하고 강조했다. 반드시 내 의견에 동조해야 할 것처럼 일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공감은 하되 존중은 부족했던 모양이다. 다른 결의 생각을 전할 때 말을 가다듬어야 하는 것도 에너지 소모라 판단해서 그럴 바엔 그냥 나를 숨기고 습관적인 공감을 택했다. 그러니 결국 이것 또한 내 이기심의 단면이었던 거겠지.
진정한 교감을 위해서는 이해와 대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는 사소하고 거대한 마찰이 수시로 발생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코드가 맞지 않다거나 결이 다르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모두가 다르면서도 모두가 비슷한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 맞는 마음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교류하고 소통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가진 에너지의 양이 천차만별이라서 단 한 사람과의 교류에도 쉽게 지쳐버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충돌에 대한 면역력이 약한 나 같은 사람들. 이런 이들은 작은 상처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받고, 그런 자신을 지키고자 마음을 문을 쉽게 닫고 잘 열지 않는다. 모종의 이유가 기적처럼 맞닿지 않는 한 진심과 진심이 만나는 일은 희박했다. 진심을 마주하는 일은 대체로 피곤하고 긴장되기 마련이라 최대한 대중적으로 감정을 정제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습관적 공감을 방어기제로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끝맛이 씁쓸하다면, 결국 올바른 방법은 아닌 거겠지. 돌이켜 보면 습관적으로 반응하느라 내 마음은 늘 뒷전이었다. 불쑥 밀려오는 내 생각은 낄 자리가 없었고, 나조차 나를 외면하니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늘 찝찝했다.
습관적 공감을 멈추기 위해 침묵을 유지하기로 했다. 상대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액션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을 제어하고, 사이사이 찾아오는 정적을 견뎌보기로 했다. 혹시나 너무 부담스러워진다면 생각의 흐름을 바깥이 아닌 안으로 흐르게끔 길을 내기로 했다. 상대가 날 어떻게 볼까-에 대한 집중보다 일단 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한 어찌 됐든 그건 나에게 머무는 어떤 것일 뿐이니까.
물론 하루아침에 고쳐지진 않으리란 걸 잘 안다. 타고난 성향 탓에 완전히 고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안다. 정석을 알면서도 평생에 의해 각인된 손가락 근육의 움직임을 이기지 못해 여전히 어린 시절 잘못 습득한 젓가락질을 못 고치고 있는데,
하물며 마음이라고 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