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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거면 정말 괜찮아요!

부서지거나 피어나거나

by 잎새 달 이레

방송 작가로 일하던 언젠가 만난 아이.


프로그램은 부모와 아이가 동반 출연하는 형식이었고, 촬영은 본 촬영 전 사전 촬영이 선제 진행되는 형태로 총 2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작가진 구성은 메인, 서브, 막내를 한 팀으로 하여 로테이션되었고, 직급별 인원 수가 상이하여 회차마다 구성이 달라졌다. 당시 촬영 회차는 내 담당이 아니었지만, 으레 본 촬영엔 일손이 많이 필요하므로 담당이 아닌 막내도 서포트 역할로 촬영에 합류하곤 했다. 그래서 그날 난 그 아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앞서 만난 제작진과의 재회에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던 아이는 어느새 슬며시 내게 와서 “오늘 처음 봤는데 어디서 본 것 같아요.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지금 기억이 안 나요!”라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아이만의 순수한 환영이었다. 7살 남짓한 그 아이의 평생에 나와 닮은 사람이 존재했었는지 아이는 연신 같은 말을 반복하며 신기해했고, 나는 이 아이가 초면이지만 발랄한 이 의문에 “날 본 거 같아~? 어디서 봤을까~?”라며 맞장구쳐 주었다. 한참 골몰하던 아이는 “분명히 봤는데! KBS2에서!!”라는 예상 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옆에서 우연히 이 대화를 들은 서브 작가님은 '언제 방청 간 적 있냐'라며 농담을 하셨고, 아이는 별안간 신이 나서는 “근데 그 사람은 키가 작았는데 지금 언니는 키가 되~게 크시네요!”라며 방방 뛰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도 잘 걸고, 웃음을 나눠주는 사랑스러운 아이. 이렇게나 말을 예쁘게 말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정다운 아이였다.

그렇게 한참 녹화가 진행되던 중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현장 프리뷰를 위해 한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가 잠시 통화할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운 그 사이 누군가 벽에 걸려있던 시계를 거두어 내가 있던 자리에 내려둔 모양이었다. 통화 후 제자리로 돌아왔을 땐 그런 사정 따위 알 턱이 없었고,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이 몰린 터라 발아래 상황을 살피기 쉽지 않았다. 결국 내 발에 차여 시계는 부서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상황을 바로 목격한 아이의 어머니는 순간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셨다. 내 딴에도 그 잠깐 사이에 이런 변수가 생겨 당황스럽고 억울한 참이었다.


부서진 시계는 선물 받은 거라 했다. 자초지종은 알지 못하지만 ‘괜찮다’ 말하면서도 전혀 괜찮지 않은 어머니의 표정으로 짐작하건대 꽤나 유의미한 선물인 듯했다. 부서진 건 단순히 시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내 사정이 어떻든 결국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만큼 어머니께 진심으로 사과드렸다. 한편으론 어린 맘에 억울하기도 해서 나도 내 나름의 사정을 피력했으나 그 누구도 자기가 거기 시계를 내려뒀다며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죄송함과 별개로 책임을 나눠지지 않으려는 불상의 어떤 이가 굉장히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때 아이가 불쑥 “다친 사람만 없으면 되죠!!”라고 외쳤다. 모두의 머리 위로 커다란 느낌표가 떠올랐고, 어디선가 작은 탄성도 들려왔던 것 같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다시 노랗게 물들면서 이내 어머니의 표정또한 누그러졌다. 물론 아이는 그 시계의 역사를 모르기에 그리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거기 배인 의미를 몰라서 그냥 궁지에 몰린 누군가에게 대한 측은지심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어른 틈 사이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뚫고 외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한 마디는 단단한 콘크리트를 뚫고 피어난 한 송이 선명한 민들레처럼 빛났다. 어떻게 그 순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더니 나중에는 내게 슬며시 다가와 어쩌다가 그랬냐고 따로 물었다. 나는 나의 최대한 나의 억울함은 배제하고 간단히 상황만 전달했다. “언니가 살짝 움직이려고 했는데 시계가 있는 줄 모르고 넘어뜨려버렸어”라고 말했더니 아이는 “아~ 그런 거면 정말 괜찮아요! 나는 또 이렇게 뻥~! 차버린 줄 알았어요”라며 허공에다 귀여운 발차기를 해 보였다. 그러고는 내 허리께 오는 신장으로 가득 팔을 벌려 나를 안아주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정말 괜찮다고 다독이면서. 마음속에 따뜻한 무언가 울렁이다가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인생에 이렇듯 작은 아이에게 위로받은 적이 있었던가. 위로는 누구나 해줄 수 있고, 사랑의 방향을 다각도인 건데 나도 모르게 진심 어린 위로는 세상을 더 많이 살아본 이들만이 건넬 수 있는 일방향적인 무엇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품에 안긴 아이의 체온을 느끼고 있노라니 ‘천사 같은 아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고, 어린아이로부터 받는 이해와 관용 또한 여지없이 따뜻했다.


어느덧 막바지로 향해가는 녹화. 인터뷰 프리뷰를 위해 쏟아지는 말을 활자로 기록하느라 바삐 타이핑하는 내 모습이 신기했는지 아이는 어느새 곁에 다가와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방에 들어가서는 '빨아먹는 젤리'를 챙겨 나오더니 “이거 절대로 마시면 안 돼요! 꼭 씹어서 먹어야 돼요. 알겠죠?!” 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손에 쥔 나머지를 다른 제작진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이가 나눠주는 건 젤리뿐만이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이다가도 자신의 하나뿐인 꿈은 ‘아빠를 우주로 날려버리고 온 가족이 우주 행성을 구경하는 것’이라던 순수하기 이를 데 없던 그 아이.


만나게 되어 참 다행이었다.


사랑이 참 많았던 아이. 예쁘게 자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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