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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니스 Mar 28. 2024

울산으로 8개월 출장을 가라구요?

Episode 6. 지방 근무의 양면

2022년 7월~2023년 2월

나는 자그마치 8개월 동안 출장을 다녀왔다.


1년 중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타지 생활을 하게 된 나에게 농담 섞인 덕담들이 쏟아졌다.


“울산이면 광역시잖어~ 대도시네”

“그래서 보수는 얼마 올려준대?”

“그 정도면 *좌천된 거 아니야?“

*좌천: 낮은 관직이나 지위로 떨어지거나 외직으로 전근되는 일


장기 출장의 사유는 간단하다.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가 잘 되면서 생산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가 잘 돼서 좋긴 한데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할 지경이었다.


출장지는 울산광역시에 속해있으나 울산 사람들도 모른다는 ‘온산’이라는 곳이다(혹시 온산을 아시는 분?). 온산은 대기업 공장 단지들이 한데 모여있는 지역으로,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보이는 동네다.

서울 근무지~출장지 (410 km)

서울에서 온산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기차를 타고 달리거나 하늘을 달리거나. 서울 집에서 공장 입구까지 KTX로는 4시간이 걸리고, 비행기로는 2시간이 걸린다. 즉, 나의 출장지는 서울에서 출퇴근하면서 근무하기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렇게 출장이라는 명목 하에 8개월 동안 *5촌2도 생활을 하게 되었다.

*5촌2도: 5일 지방, 2일 도시에서 지내는 라이프스타일


많은 이들의 축복과 놀림 속에서 시작된 울산 생활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그로부터 어느덧 2년이나 지난 지금, 잠시 맛봤던 울산에서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할만했다.”


MZ세대의 지방 근무를 기피 현상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서울과 지방(공장) 근무를 둘 다 경험해 보면서, 왜 젊은 층들이 지방 근무를 기피하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반면, 극단적으로 지방 근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만큼 지방 생활은 장단점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환경이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장점이 곧 단점으로 또한 단점이 곧 장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서울 토박이 입장에서 바라본 지방 근무의 양면적인 특징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방 인구 소멸이 중대한 과제로 대두된 요즘, 이 글이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에 작은 보탬이 되길 바란다.


정이 많다=선이 없다


지방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보다 정이 많다.

정이 많다는 의미를 '따듯하다'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계산적이지 않다' 혹은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내가 만나본 지방 분들은 확실히 서울 사람보다 덜 이기적이고 덜 개인적이었다.


가성비를 초월하는 인심

울산에 출장을 가면 매일 행해지는 의식(儀式)이 있었다. 바로, 아침 식사다. 서울에서 근무할 때는 아침밥을 종종 거르게 됐었는데, 공장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려면 아침이라도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 한다. 번거롭기는 했지만 막상 아침 식사를 할 때면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울산 신정동 터미널식당 (출처: 네이버리뷰)

놀랍게도, 이렇게 육해공이 다 들어간 상차림이 단돈 8천원이다. 서울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가성비였다. 심지어 맛있고 무한리필이다. 매일 메뉴가 조금씩 바뀌어서 집밥을 먹는 느낌이 든다.


어느 날은 내가 소세지부침을 좋아하는 걸 아시고, 서울에서 온 아가씨가 소세지를 좋아한다며 반찬으로만 소세지 20장을 부쳐주시기도 했다. 울산에서의 마지막 날에도 이 집에서 식사를 하고 떠날 만큼 정이 많이 든 식당이었다.


이 식당 외에도 동네 빵집 아주머니는 빵을 5개 이상 사면 2~3개를 꼭 서비스로 얹어주셨다. 가끔 반찬이 부실한 서울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울산에서 만나 뵀던 사장님들이 생각나곤 한다.


‘우리는 하나’ 공장 문화

울산 공장에는 특이한 문화가 있었다. 매주 축구모임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상사들이 주최한 자리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주최자는 내 또래 선임이었고,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석을 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유가 있었다. 울산에 연고가 없는 분들에게는 회사 사람들이 곧 울산에 있는 유일한 인맥이다. 자연스럽게 사내 사모임이 서울에서 살 때보다는 잦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회식문화도 더 정겹다

또한, 업무를 대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서울에서 일을 하면서 자주 듣던 말이 있었다. "이걸 제가 왜요?" 그만큼 서울(본사)에서 근무를 하면 R&R 구분이 중요하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 아니면 굳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반면 울산에서는 이런 선 긋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서로 도울 수 있으면 돕자'는 마인드가 전반적으로 장착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울산 공장에 도착해서 건물마다 인사를 돌 때였다(이 또한 공장 문화다). 하나 같이 인사말처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8개월 동안 같이 동거동락하며 일을 해보니, 그때 그 말씀이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선은 적당히 지켜주세요

모든 특징은 양면성을 지닌다.

정을 쌓아가면서 사생활을 묻지 않는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친해지고 싶어서 던지셨던 질문들이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남자친구 있어? 결혼은 언제 하노?”는 물론이고, “집에 재산이 어느정도지?” 등 이런 걸 왜 물어보지 싶은 선 넘는 질문들을 받을 때가 있었다(심지어 팀장님과 내가 애인사이냐고 묻는 식당 사장님도 계셨다).


물론 서울에도 무례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 다만, 서울에서 했을 때 큰 파장을 몰고 올만한 한마디가 울산에서는 그저 농담처럼 흘러가곤 했었다.


가끔은 서울 사람에 대한 열등감을 표출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너무 계산적이다”, ” 서울에서 온 연구원들은 이런 것도 못하더라“ 하며 위계질서나 기강을 잡으시려는 공장 어른들도 자주 만나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R&R에 대해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공장에서 상부상조 정신을 보고 배운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부서 간의 책임과 업무 분담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공장에 있는 원료 보관소에서 일을 잘못 처리하면서 제품 품질에 이슈가 발생했던 적이 있었다. 귀책사유가 분명한 일인데도 일정이 급하니까 좋게좋게 마무리하고 넘겼었다. 그러나 생산 결과의 보고기한이 가까워지면서, 그 뒤처리를 (책임이 없는) 내가 다 하게 되는 상황이 있었다.


업무와 책임 분배가 명확히 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급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업무까지 떠안게 된다. 참고로 MZ세대는 이렇게 애매한 상황을 매우 싫어한다. 공장에 젊은 선임들을 잘 유치하기 위해서는, 공장의 업무 문화를 보다 더 체계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돈을 많이 모은다=돈 쓸 일이 없다


울산에서 지내면서 나는 한 달에 30만원 이상 소비한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는 식비만 30만원이 넘게 나갔는데. 확실히 근무 환경이 소비와 저축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듯했다.


지방으로 발령이 난 경우, (대부분의) 회사에서 전월세 지원을 해준다. 게다가 점심저녁 회사에서 먹고 셔틀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면 평일에는 신용카드가 필요 없을 정도다.

공장 점심에 바나나 브륄레라니

3년 전에 대전에서 일하던 선배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대전에서 있으면 돈 쓸 일이 없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럼 돈도 많이 모으고.. 좋은거 아닌가?’라고 생각을 했었다. 서울에 살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데 말이다.


실제로 8개월 울산 생활을 하면서 나는 돈을 꽤 많이 모았다. 서울에서 살 때보다 저축액이 50% 넘게 늘어났다. 출장 기간에 바빠서인 탓도 있었지만 지방 물가는 서울보다 현저히 싸고, 대기업일 경우 공장에서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주기 때문에 식대가 들지 않는다. 지방 생활은 돈 모으기 정말 좋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핫플은 가고 싶다

MZ세대가 서울 근무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프라(Infra)의 차이 때문이다. 


울산에 지내면서 시내도 가보고, 병원을 갈 일이 있어 주민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 대단지도 가봤었다. 역시 지내면 지낼수록 충분히 살만 한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집값이 싸서(30평대 아파트가 3억 내외) 노후에 지내기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주말마다 서울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서울에서 쉽게 누릴 수 있는 인프라를 지방에서 즐기기는 꽤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뮤지컬을 보고 싶다고 하자. 서울에서는 지하철 타고 1시간 이내로 이동하면 된다. 반면 울산에서는 뮤지컬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 자체도 거의 없고, 차를 타고 1시간 이상을 나가야 문화생활을 즐길 수가 있다.


물론 토속음식은 지방이 정말 잘한다. 아직도 비가 오면 그때 출장지에서 먹었던 어탕수제비가 생각이 난다. 하지만 이 외에 20~30대가 찾는 갬성 레스토랑들은 죄다 서울에 몰려있다. 서울과 지방에 있는 핫플들을 가보면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인테리어 수준과 맛 차이가 크다고 느껴졌다.


강남 아파트가 다른 서울 아파트들보다 3배 이상 비싼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이 없다고 하소연하면서도, 돈을 쓸 필요가 없는 곳보다 돈을 쓸 일이 많은 곳을 선호한다. 이게 바로 인프라가 가진 파워다.




새벽 2시에 찍어본 나의 모습

지방 근무에 대한 선호도도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조용하고 안정적인 삶을 지향한다면 지방에서 일하면서 자리 잡고 사는 게 잘 맞을 것이다. 반면 시끄럽고 복잡하더라도 인프라의 편리함을 누리고 싶다면 서울 생활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방 근무를 기피하는 성향을 가진 MZ세대 인재를 확보하고 싶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회사는 세대가 가진 가치관을 반영하여 지방 근무에 대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바로 보상 강화다. 불가피하게 지방 근무를 장단기적으로 해야 하는 직무의 경우, 보상 체계에서 차별적인 혜택을 줘야 한다.


8개월이라는 긴 출장 기간 동안 나의 연봉에는 1%도 변화가 없었다. 같은 연봉을 받고 매일같이 칼퇴하는 입사 동기들을 보면, 나의 환경이 더 부당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울산 생활이 좋은 추억을 줬지만, 머지않아 이 팀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울산에 가고 싶다(울산이라기보다는 온산에 가깝지만).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누군가 울산 출신이라 하면 괜히 반갑고 그렇다. 이번 여름휴가는 울산으로 가야겠다. 이번에도 어탕수제비는 꼭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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