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좋은 평판의 원칙
밸런스 게임을 해보자.
"착한데 일 못하는 사람" VS "싸가지 없지만 일 잘하는 사람"
당신이 사수라면,
어떤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싶은가?
작년만 해도 나는 무조건 후자와 같은 사람과 일을 하고 싶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연차와 경력이 쌓이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특히 '나'를 돌아볼수록 말이다.
2020년 말에 ‘동료 평가 제도'가 새로 도입되었다.
개인평가 항목에 '동료 평가'가 추가가 되었고, 12월(평가 통보 이후)이면 사내 포털 사이트를 통해 나에 대한 동료들의 리뷰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초 경고장 사건 후에 나의 평판은 완전 망했다고 생각했다. 제때 진급도 어려울 거고 당연히 평가도 안 좋게 받을 거라 단념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할 겸,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채 ‘동료 평가 항목’을 클릭해봤다.
“웃는 모습, 항상 주위를 밝게 만드는 큰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좋습니다. 과제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업무의 실행 능력이 뛰어나며 본인이 맡은 업무에 대한 열정 및 원활한 소통으로 인해 과제 진척이나 성과에 상당한 기여를 합니다."
반전이었다.
물론 상부상조의 마음으로 동료리뷰에 서로 덕담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를 감안한다고 해도 팀원 중 5명이나 나의 ‘실력’을 칭찬하는 평가를 남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동기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특별히 뛰어난 성과를 낸 적이 없었고, '생긴거랑 다르게 허당이다'라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의 ‘노력’이나 ‘수고’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능력’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나 많다니?
나에 대해 가장 긴 리뷰를 쓴 사람은 나의 사수였다(딱 봐도 내용이 사수님이 쓰신 글이었다). 사수님은 철벽남 캐릭터를 가진 분이다. 회사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온 고참으로 팀에서 터줏대감 역할을 맡고 계신 반면에 말이 없고 퉁명스럽기로 유명했다.
사수님과 함께 일을 한 지 2년 정도 됐을 즈음, 나는 꽤 설레는 고백을 듣게 되었다. 사수님은 회식 자리에서 살짝 취하신 상태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과 일을 해봤지만..
덕분에 나는 ‘철벽남의 마음을 연 최초의 선임‘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또 근래에 사수님 이외에도 (팀장님 피셜) 나랑 같이 일하고자 하는 책임님들이 많아졌다는 소문이 어깨너머로 들려왔다.
처음에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나보다 일을 더 잘하는 선임들도 많은데 책임님들은 왜 하필 나랑 일을 하고 싶어 할까? 그 많은 후배들과 나는 무엇이 달랐을까? 한참 뒤에 나에게도 후배들이 생기면서 '나 같은 후배가 왜 평판이 좋았는지' 그 이유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비법 1.
토달지 말고
일단 시킨대로 실행하기
사내 서베이 결과, 팀장을 포함한 직장 내 사수들이 후배들에게 가장 바라는 태도는 '겸손함'이라고 한다.
신입이든 경력직이든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시작한다면 일단 배우려는 자세부터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학원에서 공부를 오래 했다고 한들 회사 일은 엄연히 다른 분야다. 내가 몸 담고 있는 R&D(연구직) 직무에는 공부머리가 좋은 석박사들이 입사를 한다. 입이 떡 벌어지는 스펙을 가지고 입사하는 박사급 신입들도 많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회사에서 적응을 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단순 업무에서 헤매는 경우를 더 자주 봤던 것 같다. 즉, 일머리와 공부머리는 다르다.
게다가 모든 분야에서 그렇듯, ‘내공’은 선배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이다. 일머리가 좋다고 단기간에 가질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굵직한 이슈를 선임급에게 맡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업무 중요도가 높을수록 선임보다는 경험이 많은 (과장 이상)책임 라인에서 *트러블슈팅을 맡게 되기 마련이다. 직무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연구직이라는 경험과 내공이 중요한 파트에서는 후배들에게 창의적인 업무 능력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트러블슈팅: 문제 해결
그렇다면 어떤 후배를 보고 '일을 잘한다'라고 평가를 할까? 바로 '시키는 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업무 능력이 대단히 특출 나지 않는 이상, '태도'를 보고 그 사람의 실력을 평가하게 된다. 실무 경험이 부족한 사원·선임급에게 '겸손함'은 좋은 평판을 갖는 데에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시키는 대로 실행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업무 스타일과 맞지 않는 지시를 받는다면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머리가 좋을수록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실행은 매우 어려운 미션이다.
그러나 딱 한 번이라도 상사 지시대로 실행을 해본 다음에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해 보자. 단기적으로는 나의 방식이 맞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상사의 지시대로 하는 게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었을 때 자아(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된다. 후배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도 상사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둘의 관계가 어긋날 수 있다(이는 자연스럽게 사내 평판에 영향을 주게 된다). 지난 5년 동안 이러한 이유로 일은 잘하지만 동료 평가 점수를 낮게 받은 동료들을 많이 봐왔다.
비법 2.
상사가 물어보기 전에
공유하기
상사가 물어보기 전에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보고하는 후배들은 항상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사수도 후배들의 눈치를 본다. 그래서 업무 진행상황이 궁금해도 막상 물어보지 못하고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주간보고를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상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후배를 더 좋게 평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또한, 일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상사에게 틈틈이 보고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업무 방식이 될 수 있다. 공감하겠지만 상사들마다 추구하는 업무 스타일이 다르다. 막상 상사의 지시대로 일을 처리했는데 나중에 '그렇게 하면 안 됐다'라며 혼이 났던 적도 있었다. 어차피 혼날 거면 되도록 업무 초반에 혼나는 게 시간 낭비를 덜 하는 방법일 것이다.
정말 무능한 상사가 아니고서는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검토하고 조언해 주는 걸 귀찮아하지 않는다. 바쁜 상사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지금까지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상사와 조금이라도 나누면서 실행해 보는 게 어떨까?
비법 3.
상사 높여주기
마지막으로, 상사는 자신을 높여주는 후배를 무조건 좋게 본다. 이건 100% 적중하는 비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칭찬'이 호감도를 높인다는 사실은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아부성 칭찬'임을 안다고 해도 상대에 대한 호감도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내 정치'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상사에게 아부를 떨어라'가 마지막 비법은 아니다. 여기서 '높여준다'의 의미는 나의 공을 상사에게 돌리는 걸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맡은 프로젝트가 잘 됐을 때 '팀장님이 주신 피드백대로 했더니 잘됐다'라고 말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상사의 공이 구체적일수록 좋다. 미팅이나 회식과 같은 다수가 있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게 된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상사에 대한 사적인 칭찬보다 '업무적인 칭찬'이 장기적으로 상사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준다. 이것이 아부성 칭찬과의 차별점이다.
'상사에게 잘 보일 필요 없다, 내 실력으로 인정받겠다'라는 입장이라면 이 글은 그저 꼰대스러운 조언일 것이다. 하지만 상사가 나의 *인사권을 쥐고 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회사에서 더 높은 직위로 올라가고 싶다면 상사와 동료 간의 관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인사권: 채용, 배치, 이동, 인사고과, 승진 등 경영조직에서 근로자의 지위변동이나 처우에 관계되는 사용자의 결정권한
사내 인간관계를 잘 가꾸는 것은 직무와 관계없이 장기적으로 갖춰야 하는 역량이고 실력이다. 실리콘밸리의 FANNG(빅테크)도 경력직 채용 시 *평판 조회(Reference check)를 가장 중요시 여긴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는 사람과 사람이 함께 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입사 5년차가 되어서야, 평판도 실력이 된다는 걸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