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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니스 Oct 22. 2024

나라면 삼남매를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에필로그. 연재 중 찾아온 천사

“축하드려요, 임신 5주 차입니다.”


두 번째 브런치북 연재 중 천사가 찾아왔다. 그것도 나의 출생(出生)에 대한 에세이를 쓰던 타이밍에. 선물처럼 새 생명이 찾아와 줬다.


산부인과에 다녀오면서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첫째는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내 입으로 뱉은 말에 스스로 멈칫했다. 내 평생 가장 혐오했던 문장이었다. ‘아들이었으면’ 혹은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말. 하지만 내가 임신했다는 걸 알고 가장 먼저 ‘아기 성별’이 궁금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성별’ 취향에 대한 반감이 컸다. 내가 삼남매 중 하필 둘째딸로 태어났어서 그렇다. 그저 아기는 염색체의 만남에 따라 남자 혹은 여자 아기로 태어났을 뿐인데.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성별 때문에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내가 (게다가) 아들을 바란다고 커밍아웃을 해버리다니. 남편도 듣고 놀란 눈치였다.


임신 8주 차.

나는, 내 안에 있는 아주 모순적인 감정을 발견했다. 우리 부부에게 찾아와 준 아기가 너무 소중하면서 질투가 났다. ‘첫번째 아기’가 주는 감격이 온몸을 지배하면서 첫째만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버렸다.


‘둘째인 내가 그토록 바래왔던 절대적인 사랑을 첫째는 온전히 받고 태어났겠구나, 내가 어떻게 해도 될 수 없는 첫사랑 같은 존재였겠구나.’ 


이상하게도 이 무력한 현실을 인정하고 나니 내 안에 있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33년간 마음속 깊숙이 자리해 온 시기심, 열등감, 피해의식 등 찌질한 감정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순리에 따른 불공정함을, ‘첫아이’와 ‘첫아들’이라는 특별함을. 행여나 나의 가치가 부정당할까 봐 애써 부인해 온 시간들이 나를 더 상처 입혔던 것 같다.


주변에 육아 선배들은 이렇게 말한다.

“첫째랑 둘째 중에 안 예쁜 아기는 없어. 그저 어떨 때는 첫째가 더 눈이 가고, 어떨 때는 둘째밖에 안 보이고 할 뿐이지.”


그래, 나도 둘째까지는 낳아봐야겠다. 그리고 보란 듯이 공평하게 두 아이들을 사랑해 보리라.


온전한 공감은 상대방과 같은 입장이 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나는 이제 엄마와 온전히 공감해보려고 한다. 나도 엄마가 되어 ‘인간인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와 진정한 화해를 하고 싶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하루하루 그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배가 불러갈수록 하루하루 더.


오늘도 뱃속 아가에게 감사인사를 건넨다. 네가 엄마(나)의 마음을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어주었다고. 너로 인해 묵혀있던 나의 흉터가 옅어지고 있다고.


고마워 아가야. 내년에 건강히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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