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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자향

브레이브 하트와 비밀의 정원

스코틀랜드 여행

by Binsom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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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는 평화로운 전원의 표정을 짓고 있지만, 미묘한 전의(戰意)가 감돈다. 나의 선입견에서 그런 느낌이 오는 것일까. 이를테면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영향? 잉글랜드라는 잘 나가는 나라 옆에서 자기 정체성을 주장하고 건사하기 위한 외로운 투쟁이, 그 땅의 내면에 암각화(巖刻畵)처럼 새겨져있다. 컬로덴 하우스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던 그날, 그 테이블에 앉은 외국인들 사이에 잠깐 의미있는 침묵이 감돌 때가 있었다. 저마다 발렌타인사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중의 두 명은 스코티시였고 한 명은 잉글리시였다. 무슨 얘긴가의 끝에 “우리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 사람들을 안좋아합니다만...”이란 말이 나왔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죽인 전쟁의 기억들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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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적(敵)이란 말은 대립어같아 보이지만 사실, 같은 말이기 쉽다. 이웃하는 사이일 수록 원한의 상처들은 깊이 패인다. 평화는 잠정적이며 전쟁의 앙금은 거의 영원하다. 한때의 역학관계나 힘의 질서는 상대를 일시적으로 굴복시킬 수 있지만, 마음 전부를 모두 고개 숙이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코틀랜드는 전사(戰士)의 가슴을 가진 나라다. 전쟁과 평화는 얼터너티브가 아니다. 전쟁이 평화를 만든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전쟁을 치러야 하는 절박한 길이었다.



그 나라에는 산이 드물다. 온 땅이 그저 평원의 연속이다. 이런 땅에선 숨을 데가 없다. 맨가슴으로 달려나와 적을 무찔러야 한다. 잉글랜드의 옛성에 전시되어 있던 투구와 창들을 기억한다. 그 투구는 스코티시 전사들의 칼을 피하기 위한 것들이었으며, 그 창들은 그 전사들의 가슴에 꽂아 피를 뿜게 했던 그 무기였으리라. 사내들은 목이 잘리고 여인들은 강간당했던 그 땅의 기억이, 발렌타인에 취한다고, 그리고 새 문명의 질서들에 편입된 지금이라고 쉬 잊혀지기야 하겠는가. 영화 '더 라스트 킹'에서 스코티시 의사는 소리친다. "나는 영국인이 아니예요. 스코틀랜드 출신이예요. 그리고 잘난 척하는 영국인들이 싫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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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일정 중에는, 그런 생각을 잇게 하는 기회가 있었다. 컬로덴 하우스에서 한 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달려간 황야에서, 우리는 활을 쏘고 총을 쏘았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산 속을 미친 듯이 날뛰는 자벌레같은 지프차를 탔다. 비가 추척추적 내리는 날, 흙길 속을 걸으며 브레이브 하트의 신산한 기분을 느낀 건 나 만일까. 사냥과 전쟁의 충동들이 우릴 잠깐 흥분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팀 단위로 게임을 벌였는데, 뜻밖에도 최약체로 보였던 우리 팀이 5팀 중에서 일등을 했다. 성적이 발표되던 때, 우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이것이 게임이니까 망정이지, 전쟁이었다면 두 명의 ‘장군’이 포함된 다른 팀들은 그 황야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이 ‘안전한 유희’로 관리되는 때는 평화로운 시절이다. 흙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의 낡은 등산화의 밑창이 떨어져나간 그 날, 문득 나는 음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 발을 붙잡은 ‘브레이브 하트’와 그것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나, 그 검질긴 땅의 전쟁에서 나는 마침내 내 등산화 밑창을 내주고 줄행랑을 친 꼴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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