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는 그저 개념일 뿐이었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 (1/60)s iso200 F2.8
저녁 만찬에 가기 전, 내 방 침대에 놓인 특이한 물건들을 본다. 긴 끈이 달려있는 검은 구두, 붉은 색과 청색이 들어간 치마, 검정색 상의에는 사각 금단추가 가슴 앞쪽에 여섯 개 어깨에 두 개, 팔목에 여섯 개, 등 뒤에 여덟 개가 달렸다. 그리고 금단추 세 개가 달린 조끼 하나. 폭이 5센티는 넘는 큰 가죽 벨트. 앞에 있는 은색 버클에 무늬들이 휘황하다. 용도를 알기 어려운 쇠와 털가죽을 이용한 주머니가 쇠사슬 줄과 가죽에 묶여 있다. 연노랑 타이즈 두 짝과 붉은 리본이 달린 밴드 두 개.
이것이 오늘 만찬에서 입을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인 킬트이다. 이 특이하고 복잡한 의상 요소들을 펼쳐놓고 그것을 어떻게 내 몸에 걸쳐야할지 난감했다. 특히 이 낯선 곳에 와서, 치마를 입는 기분이라니...거울 앞에서 프린트에 그려진 그림을 참고하며 이것저것 착용해본다. 거울 속에는 차츰, 낯선 스코틀랜드 사내 하나가 들어와 선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잘 어울린다고 칭찬도 하고, 낄낄거리기도 했다. 이 옷 하나가 일행의 마음을 꿰어준다. 전직 대사와 기업체 사장, 신문사 부장도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아이처럼 설레고 흥분하는 표정들이 역력하다. 만찬은 일종의 코스춤 플레이다.
우리는 이날 밤,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느린 저녁을 먹으며, 우리와 다른 삶에 대해 느끼고 생각했다. 하기스라는 명품 요리가 나왔다. 순무와 양의 창자를 층층으로 섞은 음식이었다. 맛은 생각보다 심심했는데, 그건 우리 입맛의 관성 때문일 것이다. 이 음식을 내며 주인장은 스코틀랜드 시인의 하기스 예찬 시를 읊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귀가 양쪽에 달린 잔과 블렌드 매니저의 친필 사인이 있는 발렌타인을 선물 받았다. 창밖에는 정원의 풀들이 귀를 열고 비를 맞는 밤, 아름다운 유월의 한때가 위스키 향기에 취해 흘러가고 있었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 (1/60)s iso250 F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