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렌드 매니저 샌디와 함께
1. 보리의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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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을 푼 뒤, 발렌타인의 제조 공장(글렌버기 증류소)을 방문한다. 그들은 위스키 제조 현장을 돌아다니며 그 과정을 열심히 설명했다. 토요일이라서 그런가,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공장은, 방문객들에게 개방하는 ‘견학용 공장’이라고 했다. 발렌타인은 스코틀랜드의 4곳에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술에 관해 아주 무식한 나로선, 꽤 흥미로운 공부거리가 있었다. 맥주와 발렌타인 위스키가 폭탄주로 잘 어울리는 까닭은 둘 다 보리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싱글 몰트 위스키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게된다. 몰트란, 보리에 싹을 틔우는 일이다. 처음에 보리를 발효시킬 때, 그것을 물에 넣어 발아를 시킨 뒤 알맞은 때에 효모를 집어넣는다. 그러니까 아직 목숨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죽은 보리’가 아니라, 이제 막 소생하는 보리의 에너지와 맛을 훔치는 것이다. 처음에 발효를 시키면 8% 정도의 알콜 음료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것을 두 번에 걸쳐서 증류를 하면서 69%까지 알콜 순도를 높인다.
그렇게 해서 나온 주정(酒精)을 스피릿이라고 부르는 것도 흥미롭다. 보리는 이 증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영혼만 내준 채 사라진다. 인간이 마시는 것은, 보리의 영혼인 셈이다. 그레인 위스키는 보리가 아니라 옥수수나 밀 등을 섞는 것이다. 위스키의 맛은 발리 위스키(보리로 만든 위스키)를 기본으로 하면서, 어떤 비율로 다른 곡물 위스키를 배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배합의 기술이, 발렌타인 17년산, 21년산, 30년산의 명예를 만들어냈다.
2. 발렌타인 30년산
여기에 와서, 발렌타인 30년산이 반드시 30년된 술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30년이 넘은 37년, 38년산으로 만들었어도 이름은 30년산으로 붙는다. 그런데 왜 40년산, 50년산은 만들지 않을까. 이 점에 대해 발렌타인 사람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준다. 증류해서 오크통에 넣어둔 위스키는 매년 조금씩 휘발한다고 한다. 그래서 시기가 너무 오래되면 양이 너무 줄어들어 도저히 타산을 맞출 수가 없다는 얘기다.
매년 허공으로 몰래 사라지는 이 알콜들을 앤젤스 셰어(ANGEL'S SHARE)라고 부른다. 천사의 몫이라는 의미다. 말하자면 인간이 마시려고 만드는 발렌타인 위스키를 천사들이 내려와서 홀짝홀짝 마시고 간다는 얘기다. 너무 오랫 동안 오크통에 보관해두면, 인간이 마실 량이 너무 줄어들어버린다. 천사는 아마 흐뭇하게 취해있겠지만 발렌타인 회사는 천사를 위한 회사는 아니다. 그들은 오크통이 가득 차 있는 비밀공장을 열어서 보여줬는데, 그 안의 어두컴컴한 곳에서 술을 훔쳐마시며 껄껄거리고 있는 천사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지나갔다.
발렌타엔 라벨에 붙은 문장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다. 오래 전 여왕이 하사했다는 이 문장에는 위스키를 만드는 4대 요소가 그림으로 기표화되어 있다. 물과 보리, 증류와, 오크통이 그것이다. 그것들이 방패에 새겨져 있고 위에선 스코틀랜드를 수호하는 그리핀(그리핀도르, 기억하는가? 해리 포터의)이 칼을 들고 있다. 양 쪽에선 말 두 마리가 스코틀랜드 깃발을 들고 수호신처럼 서 있다. 아래에는 이 나라 국화(國花)인 엉겅퀴가 피어있다.
그 아래에는 AMICUS HUMANI GENERIS 라고 씌어져 있다. 그 의미는 ‘모든 인간은 친구다’. 그러니까 발렌타인 위스키 아래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술에 대한 국민적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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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맛을 결정하는 샌디의 ‘감각’이 한국 술꾼들의 감관과 영혼(이 술은 가끔 필름이 끊기게 한다. 그때 우리는 발렌타인의 블렌드 매니저에게 잠깐 넋을 빌려주는 셈이다)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우리 일행에게 위스키 블렌딩을 실제로 해보도록 한다. 그가 해놓은 블렌딩을 냄새 맡게 하고, 또 맛을 보게 한 뒤, 열 가지의 다른 주정을 섞어 그것과 닮도록 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코 끝으로 냄새의 차이를 분간해보며, 향기와 맛의 정수를 모아보려 했지만, 턱없이 둔한 내 코에 대해 절망만 하게 된다. 섬세한 차이들은 내게 붙들리지 않고, 뚜렷한 차이들도 그것을 계량하는 능력이 따라가지 못했다. 내가 17산과 31년산의 차이를 구별 못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걸 단지 ‘부드럽다’라고만 말하거나 폭탄주를 타먹으면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맛의 탐미주의를 말하기는 어려우리라.
우리는 공장의 또다른 비밀창고 속에 있는 이제 막 출시할 30년산 세 종류를 시음했다. 일행 중에는 감격어린 표정을 짓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발렌타인 회사는 문득 어떤 선물 하나를 준다. 펴보니 금빛 열쇠가 하나 들어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이 30년산 오크통이 쌓인 창고 열쇠를 복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일행에게 언제든지 와서 창고문을 스스로 열고, 필요한 만큼 발렌타인을 마시고 가란 얘기다. 열쇠 하나가 이토록 낭만적인 기분을 주다니...
3. <향수>의 그르누이는 생존해있다, 샌디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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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공장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보게 된다. 조지 발렌타인 이후로, 발렌타인 술의 맛을 책임지고 있는 제5대 블렌드 매니저, 샌디(Sandy Hyslop,샌디 히슬럽, 사진 위)이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은,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주정들의 맛과 향기를 배합하여 최상의 위스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17년산, 21년산, 30년산의 명성은 그의 천재적인 감각과 창의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러니까 가장 훌륭한 맛을 찾아내는 실력과, 그것을 같은 제품에서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는 감별력을 갖춰야 하는 사람이다. 블렌드 마스터는 마치 혈통을 잇듯, 도제 시스템으로 후계를 키워낸다.
그를 보면서 나는 소설 혹은 영화 ‘향수’의 주인공을 생각했다.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하나의 향수 안에 모으기 위해 수많은 여인들을 살해해 그 향기의 정수를 채취해내는 남자 장 밥티스트 그르누이. 발렌타인 위스키 회사에, 그러니까 그르누이가 실존하는 셈이다.
위스키의 그르누이라 할 만한 샌디는 보리와 옥수수, 밀의 정수를 뽑아, 그것을 절묘한 방식으로 배합함으로써 인간의 감관을 황홀하게 만든다. 블랜드 위스키는 보리로 만드는 싱글 몰트 위스키와 다른 곡류를 증류하는 그레인 위스키를 섞는 솜씨에 달려있는 술이다.
그것은 네 곳의 다른 지방에서 생산되는 각기 다른 맛과 향기를 지닌 위스키(물맛도 다르고 토양과 햇살에 따라 보리맛도 다르다. 그리고 해마다 맛이 달라지는 점도 있다)를 배합하는 수천 수만 가지의 경우의 수에서 선택하여 아름다운 비율로 섞는다. 이것이 블렌딩이다.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 감각과의 전쟁. 술의 이상향을 향한 무한한 도전과 아슬아슬한 변경의 고뇌. 샌디는 인류의 어느 낯선 첨단에서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보리의 영혼을 찾아내는 인간의 영혼. 그 순정한 게임이, 블렌드 마스터 샌디가 하는 일의 전부일 지 모른다.
당연히 그는 자기가 섞는 술의 배합 비율을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마음 속에만 그 완전한 한잔의 술을 담아두는 셈이다. 경쟁사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음 속의 술을 찾아내려고, 발렌타인을 수없이 홀짝이고 냄새를 맡으려 킁킁거려도, 천재의 코끝에만 붙들리는, 미묘하고 섬세한 향미(香味)를 이루는 배합 재료들의 구성을 분간해내지 못한다.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저 발렌타인 병 속에 든 황금빛 액체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한결같은 맛을 내놓는다. 술 속에는 이런 드라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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