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어디서 오는가
가끔 물건들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내게 어떤 태도를 지니거나 어떤 행동을 취해서 그런 건 물론 아니다.
우리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낯섬에 대한 과장이다.
우리가 처음 보는 것, 이름을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이상한 것.
물건 또한 정체를 알 수 없을 때
괴물이 주는 공포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물건 말이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30)s F2.8
두달 쯤 전에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이 놈을 발견했다. 십자가의 중심에
개구리 물갈퀴같은 둥근 살이 붙어 있는
투명 플라스틱. 그 안에는 전자제품 속에 들어있는
수상한 두뇌와 같은 회로들이 보인다.
얼핏 보면 장롱이나 방문의 돌쩌귀처럼 보이기도 하고,
컴퓨터 따위에 들어가는 부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핸드폰에 끼어있던 것으로 보기엔
좀 큰데...
노트북 어디에선가 빠진 걸까. 아니면
공기청정기나 프린터나 아니면,
진공청소기의 부품일까.
일단 중요한 것 같아서,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그게 또 나와 있다.
이게 대체 뭐람?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40)s F2.8
진공청소기!
진공청소기가 유력하다.
플라스틱 제품인 것이 그렇고,
모양새도 그런 데에 들어가기 딱 좋게 생겼다.
혹시 청소기를 돌리는 팬인가.
그런데 청소기를 돌려보니 아무 이상이 없다.
저 정도 크고 중요해보이는 부품이 빠졌다면
분명, 고장이 나 있어야 할 것이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20)s F2.8
제기랄. 도대체 어디에 있던
물건이람?
저 내부 구조 좀 봐.
사뭇 복잡하면서도 조잡스럽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어떤 물건같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20)s F2.8
투명 플라스틱 속에 들어있는 것들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분명히 어떤 기능을 가진 것임을
그 형태와 분위기가 암시하고 있다.
가만히 보니 비행접시 같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40)s F2.8
혹시 작은 UFO가 아닌가.
외계인들에게
사이즈라는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하지만 플라스틱을 타고
굳이 내 비좁은 방으로
외계인들이 잠입할 이유를
감잡기 어렵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스위치가 있다.
스위치!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40)s F2.8
스위치를 켜니 불이 들어온다.
색색의 영롱한 불이 들어온다. 그러니까
저 회로는 저 전원을 공급하는 장치였던 게다.
검은 큰 원이 아마도 배터리가 있는 쪽 같고,
거기서 나온 전기가 각각의 코드로 배분되면서
전기를 뿜는다. 놀라운 장치다.
이런 게 컴퓨터 속 어딘가에 들어있었단 말인가.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158)s F2.8
불을 켜놓으니
마음이 더 심란해진다.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사고현장으로 달려오는 앰뷸런스의 분위기가 난다.
저 스위치를 켜는 게 사고였단 말인가.
저 스위치는 사람의 손으로 켜는 게 아니라
컴퓨터가 스스로 통제하여 켜고 끄는 것이었을까.
인간의 영역이 아닌 곳에 개입한 데 대해
저 부품은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40)s F2.8
다시 내려놓고 바라본다.
저렇게 전원을 공급해서 불을 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은,
저것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부품에게서 저게 왜 필요할까.
저건 하나의 시작일 뿐이며, 저 부품 안에는
또다른 놀라운 기능이 숨어있는 것일까.
다시 집어본다. 집었다가 비행접시처럼 돌려본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80)s F2.8
어? 돌아간다.
돌아가니 진짜 비행접시같다.
아까 다섯 알의 전등은
각기 아름다운 원을 그린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80)s F2.8
이건,
팽이가 아닌가.
팽이. 그렇다면 컴퓨터의 부품이 아니라,
아이의 장난감이 아닌가.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60)s F2.8
아이가 왔다가
두고간 것이었던가?
그렇다면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잃었다고
몹시 섭섭해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팽이라면,
나라도 계속 가지고 있고 싶을 터이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80)s F2.8
팽이라고 생각하고 들여다보니
비로소 시선에 안정감이 생긴다.
무엇에서 빠져나온 물건이 아니라,
저 하나로 완성된 물건이다.
필요할 때 마다 스위치를 켜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꼭지를 틀어쥐고
살짝 비꼬아 돌리면
저 화려한 광채의 다섯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60)s F2.8
팽이는, 이제 현실이 아닌 은유의
우주선이 된다.
어떤 계략도 없이, 어떤 음모도 없이,
장난감 세상의 천진한 규칙들을 지키며
내 방안에 내려온 UFO다.
나를 매료시킬 지언정 나를 위압하지 않는다.
장난감이란 인간의 공포를
우스개 수준으로 관리하는,
놀라운 시스템이기도 하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40)s F2.8
이제 그것이 멈춰서 있을 때에도
아름다워 보인다.
그것이 도는 형상을 내가 이미 알고 있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도록 되어있는
팽이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무서운 채로 아름답기는
참 어렵다.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60)s F2.8
이제 드디어
작은 물건이 제대로 앉아 있다.
저걸 가지고 놀던 아이가 그리워질 만큼,
저 물건과 나의 관계는
안정감을 찾았다./빈섬.
[Canon] Canon DIGITAL IXUS 750 (1/50)s F2.8